삼십 대 초반, 친한 친구들은 비슷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했다.
“웬일이야! 식 올리고 나면 바로 명절이야. 명절 지내고 하지 왜 먼저 잡은 거야?”
친구들이 날짜를 잡고 나면 대부분 가장 먼저 하는 이야기는 명절과 결혼식 날짜가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였다. 일 년 열두 달 중 명절이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있다. 이렇게 걸리나, 저렇게 걸리나 결혼하고 첫 명절은 며느리들에게 건너뛸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10월에 결혼했다. 9월 추석을 지나고 식을 올렸으니 명절을 잘 피해서 날은 잘 잡았던 것이리라. 하지만 다른 복병이 있었으니 임신이었다. 결혼의 주된 목적이 아이였다는 듯이 우리는 허니문 베이비를 갖게 되었다. 원했던 임신이었지만 이리도 빨리 찾아올 줄이야. 이로 인해 임신 5개월 차에 첫 명절을 맞이하게 된다. 결혼 전 시댁엔 남자들만 있었다. 시어머니는 남편이 초등학생 때 돌아가셨다. 남편의 형님이 계셨지만 아직 장가를 안 가고 계셨다. 결혼 전부터 명절과 어머님의 제사는 내 일이라고 마음먹었던 이유였다.
나의 음식 솜씨는 형편없다. 일단 나는 예민한 미각을 소유하지 않았다. 물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야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그보다 제때, 제 끼니를 먹는 게 더 중요한 사람이다. 음식의 간을 맞추는 일은 너무 어렵다. 결혼 전에도 엄마가 음식을 하시면서 간을 좀 보라고 한 입 넣어 주면 난 당최 그 맛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가 어려웠다. 엄마의 음식을 먹으며 연신 맛있다, 맛있다를 쏟아내는 동생과 달리 맛있냐고 물어보는 엄마에게
“ 맛있으니까 먹지! 뭘 물어!” 하는 음식에 대해선 무뚝뚝한 딸이었다. 이런 내가 결혼을 하고 음식을 하려니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평일에는 친정에서 회사를 다니고 주말에 지방에서 올라오는 남편과 이틀만
간단히 해 먹는다고 하지만 명절 음식을 내가 해 낼 수 있으려나 걱정이 앞섰다.
친정은 큰 집이 아니어서 직접 제사를 지내지는 않았다. 어릴 적 큰 집과 한집에서 살았고 그러면서 제사 음식이 낯설지는 않았다는 게 이때 도움이 되어 주었다. 각 지방마다 상에 올리는 음식이 조금씩 다르다고 해서
혹여나 하는 마음에 아버님께 상에 꼭 올려야 하는 음식이 있는지 여쭤봤다. 굉장히 쿨하신 아버님
“올리 거 없으면 포랑 술만 올리면 돼!”
“아, 네......”
도움이 안 된다.
명절 음식은 내가 준비하지만, 차례는 아버님 댁에서 지냈다. 음식 만드는 게 익숙하지 않은 나는 종일 부엌에 있는다. 나중에는 너무 오래 서 있어서 다리가 아팠다. 다음 날, 만들어 놓은 나물에 생선, 전, 산적, 국, 과일까지 다시 용기에 담아 바리바리 싸서 아침 일찍 아버님 댁으로 가 다 꺼내어 제사 그릇에 담아 놓는다.
차례를 지내고 나면 다시 음식 정리해서 남은 음식 아버님 댁 냉장고에 넣어 드리고 담아 갔던 그릇들을
정리해서 다시 가지고 온다. 처음 명절과 4월에 있는 어머님 제사를 임신한 상태로 이렇게 지내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여름에 출산하고 다시 추석, 돌이 안된 아이를 데리고 다음 해 설까지 지내고 나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찾아낸 생각이란 차례와 제사를 다 우리 집으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어차피 다 내 일이고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라면 내 집에서 만들고 내 집에서 지내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버님도 이 의견에 별말씀은 없으셨다.
어머님 영정 사진을 집으로 모셔 오는 날 아버님은 혼자 약주를 한 잔 하셨다고 했다. 평소에 약주를 안 하시는 분이라 그 모습이 생소했다.
“우리 집에서 마지막 날이니까 사진 꺼내 놓고 막걸리 한 잔 했지.”
요즘 같은 시대에 큰며느리도 아닌 내가 다 맡아서 하겠다고 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자위하고 있었다. 아버님의 마지막 막걸리 한 잔에 대한 생각은 전혀 못했다.
큰아이 세 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고 2년 후 동생이 독립하면서 친정 아빠와 합가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차례상에는 두 어머님의 사진이 나란히 놓였다. 한집에서 두 안사돈의 차례를 함께 지내게 되면서 두 바깥사돈들은 자연스레 자주 만나게 되었다. 아버님은 격주로 주말이면 우리 집에 오셔서 친정아빠와 다 같이 식사를 하시곤 했다. 여름이면 당일이라도 가까운 곳으로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어머님을 친정엄마가 계신 수목장으로 모셔왔다. 두 어머님들은 나란히 두 가족 자리에 자리 잡으셨다.
그 후로 성묘도 함께 다녔다. 아버님 칠순 여행, 친정 아빠 칠순 여행도 함께했다. 두 분이 성별이 같은 게 어찌 보면 편한 일이기도 했다. 나에겐 말이다.
작년 여름 시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죽음이란 게 그렇게 조용히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것임을 엄마 때도 알았지만, 시아버님의 마지막도 역시나 낯설었다. 지금도 마지막을 대면하기는 아직 힘들다.
지난 추석, 이제 차례상에는 세 분의 사진이 놓인다. 시아버님의 사진이 놓인 왼쪽 편 그 자리에 서서 아버님은 쇠젓가락으로 빈 쇠그릇에 세 번 탕, 탕, 탕 내리치셨었다. 그리고 남편이 전해 드리는 잔을 받아 어머님들 사진 앞에 올리셨었다.
“엄마, 친할아버지가 저기 서 계셨는데 이제 사진 속에 있네.”
“그러네. 할아버지가 사진 속에 계시네...”
작은 아이의 말에 더 말을 잇지 못한다.
한동안 그랬다. 성묘가 다 무슨 소용이며, 차례상이 다 무슨 소용인가? 이건 누구를 위한 의식인가?
과연 돌아가신 분들이 이 걸 아시기나 한단 말인가?
다 내 일이라고 하면서도 음식을 지어내는 일이 힘겹게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언제고 이 모든 형식적인 의식들을 끝내리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잠들어 있지 않아요
제발 날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저 넓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죠
<천 개의 바람이 되어 , 임형주>
이번 설에도 차례상을 차린다. 나를 위한 차례상을 차린다.
당신들에게 드리는 이 상은 나를 위로하기 위함이다.
한 번 더 잘 차려낸 상을 드리고 싶은 내 마음의 위안이다.
당신 며느리의 차례상
당신 딸의 차례상
노래의 가사처럼 그곳에 계시지 말고 바람처럼 자유로우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