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0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2050

1장: 노바 앤젤레스의 어둠

by 진동길 Mar 22. 2025


노바 앤젤레스 하층부. 쓸만한 간판조차 부서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거리였다. 


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허름한 외투 하나에 의지한 제이드(Jade)가 낡은 벽에 몸을 기대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는 레플리칸트(Replican)— 정교하게 만들어진 복제인간이었으나, 제조공정 불량품을 싸게 사서 몸에 달고 지내야 했기에 언제 회로가 과열될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상태였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한쪽 어깨의 합성 피부는 이미 갈라져 빗물을 그대로 흡수하고 있었고, 억지로 덧댄 흡수 패치는 제 기능을 못해 축축해졌다. 감전될까 싶어 조심스럽게 움직이려 하지만, 갑자기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드론 프로펠러 소리에 몸이 본능적으로 움츠러든다.


“이 도시에 레플리칸트 하나가 숨어 다닌다던데… 잡으면 현상금이 꽤 세대.”


며칠 전, 늙은 청부업자가 내뱉은 경고가 제이드의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 마치 목에 칼을 들이댄 채로 “곧 죽을 수도 있다”며 조소하는 듯한 느낌. 그 이후로 노바 앤젤레스라는 도시는 제이드에게 공포 그 자체가 되었다.


등 뒤 어딘가에서 추적 드론이 나타나 신분 검증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현상금 사냥꾼이 쇠파이프를 들고 골목을 헤집어놓을 수 있는 게 이 도시의 일상이니까.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낮게 깔린 기계음이 들렸다. 전자 휘파람 같은 잡음. 제이드는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었다. “어쩌면 현상금 사냥꾼?”이런 불안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어둠에서 부스스 나타난 건 노쇠한 외투를 걸친 인간이었다. 허리에 기계 보조장치를 착용한 모습이 눈에 띄었는데, 아마 전쟁 때 다친 하반신을 사이버 이식으로 보강했을 것이다. 그는 마치 기력이 다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이 근방은 위험해요… 숨어 지내려면 더 나은 은신처를 찾아야죠.”


의외로 그의 말엔 날 선 적의대신 지친 연민이 서려 있었다. 제이드는 당황했지만, 마냥 의심만 할 수는 없었다. 거리에서 홀로 살아남으려면 어떤 기회라도 잡아야 했다.


“나를 믿기 어렵겠지만… 우선 이쪽으로 가 보시죠.”


그는 삐걱대는 손짓으로 골목 어귀를 가리켰다. 부서진 건물 두 채 사이에 놓인 낡은 문이 하나 보인다. 도로에서 언뜻 보면 산더미 같은 쓰레기더미에 묻혀 있어, 문이 있다는 걸 알아채기 힘들 법했다.


그가 열쇠 모양의 전자 칩을 문 옆에 갖다 대자, 허름한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안쪽엔 좁은 계단이 지하로 이어져 있었다. 습기 가득한 공기, 파이프에서 기묘하게 뚝뚝 떨어지는 물소리, 그리고 곰팡이 냄새가 제이드를 덮쳤다.


‘이거 완전히 달아날 길이 봉쇄된 밀실 같은데… 대체 이 남자는 뭘 숨기고 있는 거지?’


제이드는 마음속으로 불안에 몸을 떨었지만, 동시에 딱히 선택지가 없는 현실도 잘 알고 있었다. 밖에 남아 있어 봤자 곧 단속 드론에게 잡히거나, 현상금 사냥꾼에게 공격당할 게 뻔했다.


그래서 그녀는 결국 그를 따라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갔다. 가파른 계단을 한 걸음씩 디딜 때마다, 철근이 삐걱거리며 울리는 소리가 어둠 속을 맴돌았다. 남자가 조용히 앞장서며 중얼거렸다.


“폐허 같은 곳이라도, 하층에서 살아남으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니까요.”


제이드는 그 말에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도와주려는 건가? 뭘 노리는 건가? 하지만 돌아갈 곳이 없으니,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조심스럽게 믿는 척하는 것뿐이다.


습기로 질척거리는 벽과 바닥을 따라 내려가니, 깜박이는 전구 몇 개가 작은 지하실 공간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기계 보조장치를 찬 남자가 제이드 쪽을 돌아보며 아주 살짝 미소 지었다.


“아무튼 여기가… 좀 더 안전할 거요.”


제이드는 마른침을 삼키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지하실이 과연 안전한 은신처인지, 아니면 또 다른 지옥의 입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노바 앤젤레스의 칼바람 부는 골목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녀의 합성 피부는 여전히 빗물에 흥건했지만, 드디어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는 공간. 제이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부터 어떻게 될까… 여긴 정말, 날 해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걸까….’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렸고, 위태로운 네온 불빛이 울긋불긋 흔들렸다. 그 빛이 이 지하실까지는 들이치지 못했지만, 새벽이 온다면, 과연 이 도시엔 작은 희망이라도 꽃필 수 있을까.

그날 밤, 제이드의 불안과 두려움은 한층 짙어졌으나, 동시에 미세한 안도감이 가슴 한편에 스며들었다. 노쇠한 외투를 걸친 남자가 이토록 포근한 톤으로 대화를 시작했다는 게, 그녀가 의심과 공포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잠시 놓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어두운 계단 아래서, 노바 앤젤레스의 지하가 새로운 국면을 예고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레플리칸트를 추적하고, 누군가는 그 레플리칸트를 지키려 한다. 또 누군가는 모든 걸 이용해 새로운 이익을 노릴 것이다.
그러나 제이드에게 주어진 건 단 하나 — 도망칠 힘도 없는 몸으로, 이곳에 함께 숨죽인 채 앉아 새벽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2050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