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지와 소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

by 건너별

한 소년이 있었다.


그에겐 도화지 한 장이 있었다.

그 도화지는 매우 커서 끝을 알 수 없었다.



소년은 도태되지 않기 위해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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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들이 대신 그려주었다.

이따금씩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이 낙서를 해도 대신 지워줄 뿐이었다.

소년은 점점 커갔다.


그들은 이제 소년의 손을 잡고 함께 그려주었다.

가끔씩은 손을 놓고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았으나,

이내 버티지 못하고 다시 소년의 손을 잡아버렸다.


소년의 그림 실력은 조금씩 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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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무렵, 소년은 잡아주는 그들의 손길이 싫어졌다.

스스로도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 자만했다.

함께 그리는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따스함과 온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점점 마음이 아파 왔다.


하지만 소년의 반항심에 의해 제멋대로 그려지는 그림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거부하는 소년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들의 손에 상처가 늘어갔다.






소년은 자라 성인이 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소년은 도화지를 이리저리 휘날리며 그동안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그렸다.


어느 날은 그들과 상의하고 그리기도 했지만,

어느 날은 지울 수도 없는 잉크로 그림을 그려놓고는 그들에게 통보하기도 했다.




이따금씩 소년은 지워지지 않은 그들의 손의 상처를 보고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뿐, 이내 본인 생각대로 그림을 그렸다.


소년은 그의 도화지의 그림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소년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그림을 그린다.

그 소년의 그림엔 나름의 계획이 있고 낭만이 있다.



허나 그 소년은 평생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도화지는 이미 케케묵은 서랍 속 먼지 사이에 방치되어 있다는 것을.

그들이 소년의 새 도화지에 그려질 그림에 헌신한 시간과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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