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나서 나는 갑자기 의식주 해결이 안 되는 생활에 돌입했다. 언제든 가슴을 내릴 수 있는 보풀 핀 수유티 셔츠 3장을 돌려 입으며 아이가 낮잠에 빠져들면 남의 집 일해주는 사람처럼 살기 위해 밥을 몇 덩이 입에 쓸어 담았고, 남편이 있는 밤에 아이가 밤잠에 들면 늦은 시간 폭식했다. 아이가 두 돌이 되기까지 나도 통잠을 자 본 적이 없었고 아이가 깨면 수시로 기저귀를 갈고 수유를 하다가 아이를 재우기 위한 갖은 노력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이가 깨어 있을 때는 내 뒤통수조차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아이의 안전과 성장을 위해 모든 것을 아이와 함께 했다.
의식주 해결이 안 되는 것과 더불어 나를 돌아볼 시간이 없어 진심으로 아이가 태어나기 전의 생활과 하늘과 땅만큼 차이나는 삶의 모습에 이게 뭥미 싶어 엄마라는 역할에 대해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낳았으니 최선을 다해서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주고 싶은데 그것조차 정말로 벅차고 힘들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사치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나를 가꾸고 채찍질하기보다는 풀어두고 흘러가는 대로 흘러 보내는 타입이었는데 아이가 태어나고 우선순위가 내가 아닌 아이가 되자 정말 나에게 쓸 에너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져 내가 잘 지내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싶은지, 내 건강은 어떤지 따위의 생각은 한순간에 사치가 되고 나는 그저 급박하고 중요하게 내 눈앞에 닥친 아이 돌보는 것을 겨우겨우 해 나가고 있었다.
가끔 길거리에서 우리 아기 또래의 아기 엄마로 보이는 사람들이 예쁜 옷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얼굴에 화장이라도 하고 귀걸이라도 걸고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면 진심 그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족속일까? 자기를 치장할 시간이 있단 말인가? 그것은 분명히 아이를 돌본 후에 과외로 남는 시간과 에너지를 본인에게 쏟은 것일 텐데 나에게는 왜 그런 나에 대한 열심이 없을까? 내 흐트러지고 망가진 모습에 자기 연민에만 빠져 그런 내 모습이 인식되는 날 나는 슬픔에 빠졌다. 나는 그 사람들의 삶에 대한 에너지와 열심, 부지런함이 진심으로 존경스러웠지만 그것도 그때뿐, 1분이라도 남는 시간이 생겼을 때 하는 일이라곤 아이 옆에 뻗어져 못 잔 잠을 조금씩 보충하는 것뿐이었다.
아이가 두 돌이 되기까지 온전히 꼬박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차츰차츰 나아져 그 아이가 세 돌이 되니 그제야 아이와의 생활 속에 느껴지는 소소한 일상과 행복들이 내가 아이를 낳기 전에 상상하곤 했던 예상과 조금씩 맞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이가 혼자 먹고, 자고, 걷고 말하며 드디어 생물 같은 모습에서 사람다운 모습으로 변해가자 나도 다시 먹고, 자고, 생각하며 사람다운 엄마로 변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때 나는 다시 육아의 맨 처음으로 돌아갔다.
처녀 시절 나는 아이를 셋 쯤 낳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3이라는 숫자가 좋았고 다복해 보였다. 아들, 아들, 딸을 낳아 그 딸을 공주처럼 키우면 좋겠다고 남편에게 장난스레 말한 적도 있었다. 아이를 아예 낳지 않을지언정 외동으로 키우는 것은 아이에게 내가 줄 수 있는 형제자매라는 울타리를 거두는 것 같아 내 인생에 외동은 없을 거라 자신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생각이 바뀌었다. 외동을 낳고 기르는 사람들을 백 퍼센트 이해하게 되었고 나도 같은 선택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셋을 낳겠다고?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소리였다. 셋을 낳다가는 내 명이 단축될 것이 확실해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참으로 무지한 채 그저 말해본 무게 없는 말들임을 깊이 깨달았다.
아이가 두 돌에 접어들었을 때 나는 가족계획을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한 명만 더 낳기로 했다. 아이를 위해서. 하지만 나를 위해서도. 그 맘때 첫째 아들은 말을 배워서 나에게 하루 종일 말을 시켰다. 껌딱지, 껌딱지 그런 껌딱지가 없었다. 나는 하루 종일 아이와 한 묶음으로 다녔다. 아이가 싫어해서 내 친구를 만날 수도, 밖을 나갈 수도, 아이와 떨어져 있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대신할 친구를 한 명 더 만들어 주기로 결심했다. 외동을 확정한 선배 엄마들이 외동의 경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아이를 혼자 두지 못하고 또 친구처럼 놀아줘야 한다길래 그 오랜 시간까지 아들의 껌딱지 친구 역할을 감당하기 싫어서 나는 아이를 한 명 더 놓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똑같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또 겪었다. 그 죽음의 입덧을, 못 자고, 못 먹고, 못 입고, 나 대신 아이를 생각하며 사는 그 시간을 처음부터 다시 겪었다. 처음과 달라진 것이라면 돌보아야 할 대상이 하나가 아니고 둘이 되는 바람에 2배로 바쁜 것이 아니라 3배쯤으로 바쁘다는 것, 그래도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이번에는 굳은 마음을 먹고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 위해 경험에서 배운 어떤 노하우 같은 것을 가지고 조금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둘째를 맞이한다는 것 정도였다.
아이가 둘이 되니 정말 바빴다. 내 눈알은 2개인데 각기 다른 곳에서 흩어져서 나를 찾는 두 녀석을 한알의 눈알로 각각 쳐다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그렇게 못하고 급박함의 경중을 따져 한 아이의 울음에만 반응해야 할 때는 나머지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첫째 때보다 남편의 손이 더 필요하게 되어 한 사람이 한 명씩 아이를 맡아 케어해야 했다. 아이 둘을 내가 함께 봐야 할 때면 미리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 시간을 카운트 다운하며 비장한 각오로 임했다.
같은 이유로 아이가 셋인 사람, 넷인 사람, 쌍둥이를 기르는 가족을 만나면 진심으로 존경한다. 터울 있는 아이가 둘이라도 내 손 갈 곳 많은 아이들에게 내 손을 다 주지 못했는데 셋, 넷, 그리고 누가 낫다고 할 수도 없이 동시에 찾으면 어쩌랴. 누구의 울음에 먼저 반응해야 하는지 우선순위를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정해야 했던 엄마들의 그 수많은 판단을 짐작하며 그들의 수고에 머리를 숙인다. 아이 돌봄과 함께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그들의 정체성과 자기 발전의 욕구는 말하면 입 아플 지경이고 말이다.
나는 둘까지였다. 둘이 나의 최선이었다. 가끔씩 남편이 셋째 이야기를 하면 아이를 키울 때 나의 어려움을 남편은 정말로 깊이 이해는 못하나 싶어 장난인 걸 알지만 무척 속상하다.
막내가 세 돌이 되기 전까지 두 아이를 키우는 것은 참말로 난리부르스였습니다.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한 당신, 몇 명을 얼마 간격으로 낳을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