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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Sep 26. 2019

고트빈

소설 연재

민준이 바리스타로 일하기 시작한 처음 얼마간은 일주일에 두 번 꼴로 원두를 배달받았다. 원두는 향이 날아가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 작은 밀봉 팩에 담겨왔다. 요즘엔 서점에 출근하기 전 이틀에 한 번씩은 고트빈에 직접 들른다. 지미에게 미리 주문해 놓은 원두를 가지러 가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다음엔 어떤 원두를 쓸지 지미와 이야기해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고트빈은 영주가 서점을 열면서 수소문한 로스팅 업체다. 원두 질도 좋고 관리도 잘해주는 업체를 알음알음 찾았는데, 운이 좋게도 휴남동에 그런 업체가 있었다. 고트빈 대표 지미는 영주가 혼자 서점을 운영하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들러 영주가 커피를 잘 내리고 있는지 감시까지 하는 열정을 보여줬다. 원두가 아무리 좋아도 바리스타의 실력에 따라 맛이 현격히 달라지는 법이라며 직접 손님 커피를 내려준 적도 있다.


바리스타를 뽑았다는 소식에 가장 먼저 달려온 사람도 지미였다. 지미는 손님으로 위장해 민준의 커피를 여러 번 맛봤다. 시음 결과는 서점을 나서며 영주에게 즉시 보고되었다.


“영주야, 너보다 훨씬 낫다. 내가 이제 한시름 놓겠어.”

“언니, 그 정도는 아니지 않아요?”

“그 정도야, 영주야.”


민준의 커피를 네 번째 맛본 날, 지미는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민준 씨, 나 누군지 모르죠?”


말 한마디 나눈 적 없던 손님이 자신을 아느냐고 물어오자 민준은 손님을 빤히 바라봤다.


“지금 민준 씨가 손에 들고 있는 그 원두 로스팅한 사람이에요.”

“고트빈 로스터세요?”

“맞아요. 민준 씨 내일 아침 11시에 뭐해요?”


민준이 지미가 한 말의 뜻을 따져보느라 말이 없자 지미가 말했다.  


“우리 가게 한번 와봐요. 바리스타라면 자기가 쓰는 원두가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됐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니까.”


다음 날 민준은 고트빈으로 향했다. 지각 한 번 한 적 없는 요가 수업을 처음으로 빠진 날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작은 카페 같은 공간이 나왔고 카페를 지나쳐 뒷문을 열자 원두를 로스팅하는 공간이 나왔다. 민준은 로스팅 기계를 보자마자 연필깎이를 떠올렸다.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돌리면 연필을 깎아주던 조그마한 기계가 사람 크기처럼 자라 이제는 원두를 볶고 있었다. 세 명의 로스터가 각각의 로스팅 기계 앞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가운데, 어제 민준에게 말을 걸었던 지미가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 뭔가를 하나씩 골라내고 있었다. 민준이 인사를 하자 지미가 앉으라는 제스처를 했다.


“생두에서 결점두를 골라내는 거예요.”


민준이 의자에 아직 다 앉지도 않았는데 지미가 설명을 시작했다.  


“보통 핸드픽이라고 하지.”


지미는 말을 하면서도 결점두를 계속 골라냈다.


“이것 봐요. 다른 생두랑 색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검죠? 썩은 열매에서 나와서 그런 거고, 이거, 갈색, 이건 쉰 거고. 냄새 맡아봐요. 시큼하죠? 얘네들을 로스팅하기 전에 다 골라내 줘야 해요.”


지미는 같은 자세로 결점두를 끈질기게 골라냈다. 민준도 지미가 골라낸 결점두를 예로 삼으며 검거나 갈색이거나 모양이 일그러진 생두를 골랐다. 지미는 쉬지 않고 손을 움직이면서도 눈으로는 민준이 핸드픽 하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고트가 무슨 뜻인 줄 알아요?”

“염소…죠.”

“우리 가게가 고트빈인 이유는 알겠어요?”

“…글쎄요… 염소가 커피 유례랑 관련 있나…”

“오, 나 눈치 빠른 사람 좋아하는데!”


지미가 “끝.”이라고 말하더니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민준을 가장 왼쪽에 있는 로스팅 기계로 데려갔다. 막 로스팅이 끝난 원두에서 한 로스터가 핸드픽을 하고 있었다. 지미는 핸드픽을 한 번 더 해줘야 커피 맛이 좋다고 민준에게 설명했다.


“이게 오늘 민준 씨가 가져갈 원두. 분쇄만 하면 돼요.”


지미와 로스터가 원두 분쇄기로 걸음을 옮겼고 민준도 그 뒤를 따랐다.


“분쇄 단계에 따라 원두가 거칠거나 곱게 돼요. 거친 원두로 추출하는 방법이 다르고 고운 원두로 추출하는 방법이 다르고.”

“…”

“민준 씨 커피 맛있어요.”


지미가 조용히 말을 듣고 있는 민준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조금 쓰더라고. 과다 추출 때문인 것 같아서 원두를 조금 더 거칠게 갈아서 줘봤어요. 그러니까 쓴 맛이 안 나더라고. 맛이 달라진 거 알았어요?”


민준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 제가 추출 시간을 바꿔서 달라진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요.”

“오, 민준 씨도 뭔가 하고 있었구나!”


지미는 원두가 분쇄되는 동안 민준의 머리에 커피에 관한 정보를 있는 힘껏 밀어 넣어주었다. 전설에 따르면 인류가 커피를 발견하게 된 건 염소 때문이라고 했다. 염소가 작고 동그랗고 빨간 열매만 먹었다 하면 지치지도 않고 날뛰는 걸 보고 염소지기가 커피 열매의 존재와 그 효과를 처음 알았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냥 고트빈이라고 상호명을 정했지. 이거 저거 생각하기도 귀찮아서.”


지미는 카페인에 자기만큼 약한 사람도 없을 거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였다. 그런데도 커피가 너무 좋아 하루에 세네 잔은 꼭 마신다고 했다. 민준이 속으로 그럼 잠을 못 잘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하자 지미가 생각을 읽은 사람처럼 대꾸했다. “그래서 무조건 5시 전에 마셔야 돼.” 그리고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잠이 잘 안 오면 맥주 몇 잔 마시면 되고.”


커피나무는 상록수이고, 원두는 커피나무 열매의 씨앗이라고 했다. 원두는 크게 아라비카와 로부스타로 구분되는데 고트빈에서는 주로 아라비카만 취급하고 있단다. 지미는 “맛이 더 좋으니까.”라고 말했다. 지미는 민준에게 커피의 향을 결정짓는 게 무언지 아느냐고 물었고, 민준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지미는 고도라고 말해주었다. 저지대에서 자란 원두는 은은하면서 무난하고 고지대에서 자란 원두는 산미가 좋으면서 과일향이나 꽃향기가 나 복합적이라고. 처음에 영주와 원두를 고를 때 영주가 유독 초콜릿 맛과 과일향을 좋아해 이후 계속 비슷한 향미의 원두를 보내주고 있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민준은 일주일에 한 번씩 고트빈에 들렀다. 그러다가 점점 더 자주 가게 되면서 요가 시간을 바꿨다. 민준은 차츰 고트빈의 분위기를 파악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썰렁한 분위기가 느껴지면 그날은 지미가 엄청 화가 나 있는 날이었다. 당연히 화가 난 이유는 남편 때문이었다. 언젠가 민준은 혹시 지미의 남편은 유니콘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다. 로스터들도 남편을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말을 듣고 나서였다. 지미의 상상 속에서만 살아 숨 쉬며 지미에게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있는 존재.


민준의 의심을 없애 준 건 한 장의 사진이었다. 우연히 본 그 사진에서 삼십 대 초반의 젊은 지미와 지미의 남편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지미는 결혼하고 일 년도 안 된 사진이라며 저 사진을 찢어버리려고 수도 없이 시도했지만 자기가 바보 같아서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다며 남편 욕을 또 시작했다. 남편이 집을 쓰레기 장으로 만들어 놓았거나 냉장고 안 식료품을 죄다 썩게 놔둔 정도의 일로는 10분, 남편이 장례식장에 간다면서 몰래 클럽에 갔다거나 지미가 일하는 사이에 젊은 여자와 카페에 앉아 시시덕거린 걸 들킨 정도의 일로는 20분, 아무래도 남편이 지미를 돈 벌어오는 기계 그 이상으로도 그 이하로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낀 날엔 30분. 지미가 30분간 남편 욕을 하느라 민준을 붙잡고 있던 그날에 민준은 처음으로 지각을 할 뻔했다.


오늘은 10분짜리였다.


“내 발등을 내가 찍은 거야. 내가 그분한테 먼저 반했거든.”


 지미는 남편을 꼭 ‘그분’이라 칭했다.


“유유자적하는 모습이 멋진 거야. 지구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 같았다니까? 우리 친정 식구들은 뭔 일만 터지면 팝콘처럼 난리가 나거든. 부산을 떨다가 일을 그르친 게 한두 번이 아니야. 그런데 이 남자는 내가 지금까지 봤던 사람 중에 가장 느긋해. 사장한테 혼이 나도 느긋, 손님이 삿대질을 하며 욕을 해도 느긋. “ 두 사람은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처음 만났다고 했다.


“그 모습이 멋져서 내가 대시했다니까? 몇 년 사귀다가는 내가 또 결혼하자고 졸랐어. 내가 원래 독신주의였거든? 요즘은 비혼주의라고 하더라? 어렸을 때 여자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워낙 많이 봐서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어. 울 엄마, 피 섞인 이모들, 피 안 섞인 이모들 다 엄청나게들 고생했지. 후회하느라 가슴을 너무 쳐서 왼쪽 가슴에 멍들 다 들었을 거야. 그런데 내가 이 남자한테 눈이 뒤집혀서 집도 내가 다 마련할 테니 나랑 결혼하자고 매달린 거야. 그 결과가 이거야. 어제 집에 들어가니까 온 집안이 개판이야. 싱크대에 그릇도 그대로, 어딜 나갔다 왔는지 이 옷 저 옷 꺼내놓은 것도 그대로, 화장실 세면대에 머리카락도 그대로, 거기다가 배가 고파 죽겠는데 냉장고에 먹을만한 게 하나도 없어. 마지막 남은 라면 두 개를 자기가 아침에 하나, 점심에 하나 먹었다는 거야. 주말에 사 온 반찬 하고! 내가 그분 일 안 하는 걸로는 뭐라 안 한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같이 사는 사람 배려는 좀 해줘야지. 내 배는 안 고파? 라면을 먹었으면 사오든가, 그것도 싫으면 나더러 사 오라고 했어야 할 거 아니야! 이렇게 따지고 들었더니 그냥 방으로 들어가. 삐쳐서 오늘 아침까지 말 한마디 없더라.”


지미는 여기까지 쉬지 않고 말하더니 물 한 잔을 원샷하고 민준에게 말했다.


“미안해, 매번. 이렇게 말을 안 하면 내가 속이 너무 답답해서. 민준 씨, 듣기 싫지?”


이상하게도 민준은 듣기 싫지 않았다. 오히려 퇴근 후 어디 호프집 같은 데서 만나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지미가 하는 남편 욕을 다 들어주고 싶었다.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렇게 몇 시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면 민준도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았다. 이때 처음으로 민준은 자기가 꽤 오랫동안 혼자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 이상으로 받아들였다.  


“듣기 싫지 않아요. 더 하셔도 돼요.”

“아니야. 그렇게 말하니까 더 미안하다. 앞으론 조금만 할게.”

“...”

“자, 그럼 오늘 원두는 저번에 말했다시피 콜롬비아 블랜딩이야. 콜롬비아 40, 브라질 30, 에티오피아 20, 과테말라 10. 콜롬비아 커피로는 균형감을 준다고 생각하면 돼. 그럼, 브라질로는?”

“…”

“틀려도 돼. 뭘 그걸 고민해.”

“… 음…달콤함...”

“그래. 그럼 에티오피아는?”

“글쎄요... 산미?”

“응. 마지막으로 과테말라는!”

“아... 쓴맛...”

“맞았어!


고트빈을 나오던 민준은 문득 날씨가 변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어느덧 찌는 듯한 더위가 물러나고 더워도 시원한, 그러니까 가을이 오고 있었다. 더위 때문에 지난여름 내내 민준은 고트빈에서 서점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 날이 조금 더 풀리면 걸어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운동하고, 일하고, 영화 보고, 쉬고. 민준은 이 단순한 사이클이 이젠 제법 사이좋게 잘 맞물려 굴러가고 있다고 느꼈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았다. 이 정도로 살아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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