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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Sep 30. 2019

#9 민준의 과거

소설 연재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게 됐을 때 민준은 안도감을 느꼈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며 조금만 더 힘을 내라던 부모님의 말을 정말 듣기 싫어했으면서도, 민준은 대학 합격 통지서를 앞에 두고 ‘첫 단추를 잘 꿰었네’라고 생각했다. 어른들은 좋은 대학에만 들어가면 다 잘 풀릴 것이라고들 했다. 명문 대학 간판으로 뚫지 못할 벽은 없을 것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민준과 친구들은 이젠 대학 간판이  안정적인 미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민준은 지금까지처럼 대학에서도 멈추지 않고 달려야 했다.


지방 본가에서 서울로 홀로 올라온 민준은 입학식을 앞에 두고 대학 4년 계획을 세웠다. 학점, 인턴쉽, 봉사활동, 영어. 민준 친구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계획을 세우진 않았다. 부모의 재력에 따라 어디에서, 얼마나 쾌적하게, 얼마나 편히 스펙을 쌓느냐는 달라졌지만 부모의 재력도 자식들이 스스로 성취해내야 할 것들을 대신해주진 못했다. 민준은 마치 초등학교 여름방학 시간표처럼 매 학기 시간표를 짰다. 시간표대로 움직일 열정도, 의지도 민준에겐 있었다. 민준 가족은 4년 내내 한 팀이 되어 민준의 대학 등록금과 월세와 생활비라는 골대에 무사히 공을 넣기 위해 힘을 합쳐 뛰었다.


민준의 대학 생활은 아르바이트, 아르바이트, 또 아르바이트, 여기에 공부, 공부, 또 공부로 점철됐다.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지만 민준은 이것도 다 통과의례라는 생각을 했다. 이 시간만 버티면 된다. 이 순간만 넘으면 된다. 열심히 사는 건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민준에겐 있었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해 늘 피곤했어도, 그래서 가끔 늦잠을 자면 행복할 수 있는 거라고도 생각했다. 이렇게 긍정적일 수 있던 건, 실제로 민준은 지금껏 열심히 한 만큼 좋은 결과를 얻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으리란 믿음 때문이었다. 민준의 대학 4년 학점은 4.0 가까이 됐고, 모자라는 스펙도 없었으며, 그는 앞으로도 그게 뭐든 다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취업이 되질 않았다.


“야, 우리가 취업이 안 되는 게 말이 되냐? 너랑 나랑 뭐가 모자라?”


같은 과 동기 성철이 학교 앞 술집에서 소주를 원샷하며 말했다. 성철과는 오티 날 처음 만나 4년 내내 붙어 다녔다.


“우리가 모자라서 취업이 안 되는 게 아니야.”


얼굴이 불콰해진 민준도 성철을 따라 원샷을 했다.


“그럼 왜 안 되는데?”


성철은 이미 수십 번, 수백 번 했던 질문을 민준에게 또 했다. 자기 자신에게도 하루에 수도 없이 하는 질문이었다.


“구멍이 작으니까. 아니 구멍이 아예 없으니까.”


민준이 성철 잔에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구멍? 취업 구멍?”


성철도 민준 잔에 소주를 따랐다.


“아니, 단춧구멍.”


두 사람은 소주를 원샷했다.


“우리 엄마가 그랬거든, 나 고등학교 때. 첫 단추를 잘 꿰면 두 번째 단추부터는 자동적으로 착착 잘 꿰며 살게 될 거라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게 첫 단추를 잘 꿰는 거라고. 그래서 나도 우리 대학 붙었을 때 내심 안도했어. 앞으로도 지금처럼 하면 두 번째 단추, 세 번째 단추도 잘 꿸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이런 생각이 망상이었던 것 같냐? 난 망상이었다고 생각 안 해. 너도 알다시피 내가 정말 똑똑하잖냐. 너보다 내가 더 똑똑한 건 인정하지? 이렇게 똑똑한 내가 열심히까지 하는데 이 사회가 날 받아주지 않고 버티겠어?”


취기가 올라오는지 민준이 고개를 푹 숙였다가 다시 들며 계속 말했다.


“난, 대학에 들어와 정말 최선을 다해 단추를 만들었어. 너도 그랬겠지. 정확한 간격으로 단추도 잘 달았고. 너보단 내가 더 잘 달았을 거야. 생각해보니, 성철아, 단추 다는데 네 도움도 컸다. 고마워.”


민준이 성철의 어깨를 툭툭 치자 성철은 흐뭇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었다.


“너보다 더 때깔 좋은 단추를 단 나도 너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민준이 성철의 말에 살짝 미소를 짓더니 이내 충혈된 눈으로 성철을 봤다.


“죽어라 단추를 만들면서 하나 생각하지 못한 게 있던 것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엔.”

“뭐가?”


성철이 풀린 눈에 힘을 주며 물었다.


“단추를 꿸 구멍이 없었던 거야. 생각해봐. 옷이 있는데 한쪽엔 고급 단추들이 자르륵 달려있어. 그런데 반대편엔 구멍이 없는 거야. 아무도 구멍을 뚫어주지 않았거든. 그러니 내 옷을 봐. 볼썽사납게 첫 단추만 꿰져 있는 거지.”


민준의 얘기를 들으며 성철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남방을 내려다봤다. 남방에는 단추가 가지런히 달려 있었고, 첫 단추부터 꿰져있지 않았다. 성철은 뭐에 깜짝 놀란 사람처럼 어깨를 움찔하더니 급한 손놀림으로 첫 단추를 꿰고, 두 번째 단추도 꿰었다. 술에 취한 탓에 손가락은 빠릿빠릿 움직여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눈에 힘을 주고 집중해서, 그렇게 마지막 단추까지, 정성스럽게. 혹시 맨날 옷을 열고 다녀서 취업이 안 되는 건가 하고 생각하며. 민준은 성철이 그러든지 말든지 손에 든 소주잔을 처음 보는 물건이라는 듯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얼마나 웃기냐. 애초에 단추가 하나도 없었더라면 스타일 입네 하고 입고 다닐 수 있을 거 아니야. 그런데 이거 봐. 첫 단추만 꿰져있고 그 아랜 쓰지도 못할 단추가 주르륵. 이건 뭣도 아닌, 그냥 삐꾸야. 옷이 삐꾸고, 그걸 입은 나도 삐꾸고. 아, 웃프지 않냐. 내 지난 시간이 지금의 이 삐꾸 같은 모습을 위해 존재했다는 생각을 하면? 내 삶이 웃퍼질 줄이야.”

“그래도 웃픈 게 어디냐.”

“뭐가 어딘데?”

“슬프기만 한 건 아니어서 그게 어디냐고.”


민준이 성철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성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말했다.


“그런 건가! 그게 좋은 어딘건가. 나쁜 어디는 아닌 건가!”

“이 새끼 왜 이래!”

“긍정의 힘인 건가! 이런 삶도 긍정할 텐가! 진정 그럴 텐가!”


민준이 뭔 말인지 모를 말을 소리 높여 외치자, 성철이 그만하라며 민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민준이 성철의 손을 치우고는 다시 외쳤다.


“웃픈 게 어딘건가!”


민준과 성철은 이젠 함께 우리 삶이 너무 웃프다며 낄낄 웃었다. 민준은 빈 소주잔을, 성철은 소주병을 부여잡고 슬프기만 한 게 아니라서, 그나마 웃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며 또 웃었다. 웃으면서 민준이 소주를 한 병 더 시켰고, 성철이 기분이라며 계란말이와 부대찌개를 추가했으며, 새 소주병이 테이블에 놓이는 모습을 보며 두 사람은 같은 생각에 빠졌다. 다가올 언젠가 누군가가 뿅 하고 나타나 내 옷에 구멍을 좀 뚫어주길. 내가 삐꾸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줄 두 번째, 세 번째 구멍을 좀 뚫어주길. 기왕이면 내 앞의 이 친구의 옷에도 좀. 기왕이면 우리 친구들 옷에도 좀. 아니, 기왕이면 이 세상에 구멍이 넘쳐나길. 아무리 큰 단추라도 휙휙 지나다닐 수 있는 엄청 커다란 구멍이 가득하길.



민준과 성철은 이 날 술을 마시고 몇 개월이 지난 즈음부터 서로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정확히 언제부터 연락이 끊겼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확실한 건 두 사람은 지금 2년 가까이 연락하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성철은 취업이 됐는지도 몰랐다. 혼자만 취업한 탓에 미안해서 연락을 하지 못하는 거라면 민준은 친구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 취업을 못해 연락을 하지 못하는 거라면 민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민준은 대학 친구들 대부분과 연락을 끊었다. 전화가 와도 받지 않았고, 문자에도 답하지 않았다. 우연히 취업 스터디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가벼운 안부 정도만 주고받았다. 그즈음 민준은 면접 스터디를 두 개 하고 있었다. 서류심사, 적성검사, 인성검사 모두 통과해도 면접에서 자꾸 고꾸라졌다. 민준은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봤다. 얼굴 때문인가. 잘생기진 않았어도, 못생기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어딜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얼굴. 어느 직장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얼굴. 민준을 심사하는 면접관들의 얼굴과 별반 차이 없는 얼굴. 너무 흔한 얼굴이어서, 그래서 안 되는 걸까.  


민준은 진짜 면접을 치르듯 면접 스터디에 참여했다. 자신감 넘치는 인상을 주면서도 겸손함 또한 잃지 않는 표정으로 스터디 멤버가 묻는 질문에 대답했다. 너무 진취적이진 않으면서도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누구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생각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몸가짐을 익히려 노력했다. 도발적이지도 소심하지도 않게, 대학을 졸업하고 2년을 훌쩍 넘어서까지 취업을 못한 건 회사가 민준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지 민준에게 흠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라는 듯 당당하게.


그리고 또 한 번의 불합격 통지.


최종 면접까지 갔던 회사에서 문자로 불합격을 알려왔다. 민준은 문자를 한 번 더 읽고 바로 삭제했다. 그는 가만히 서서 지금 자기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헤아려봤다. 실망했나, 화났나, 부끄럽나, 죽고 싶나. 아니었다. 민준은 홀가분했다. 그는 이 회사가 그가 지원할 마지막 회사가 되리라고 예감하고 있었다. 어떤 의지가 발현된 건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 더는 취업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예전에 지원해 놓은 회사에서 적성 검사를 하러 오라면 갔고, 면접을 보러 오라면 갔을 뿐이다. 습관처럼 성실하게 굴었고, 습관처럼 긴장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만하면 됐다. 민준은 정말 홀가분했다.


“엄마, 괜찮아. 과외하면 생활비는 충분히 벌어. 걱정하지 마. 쉬다가 다시 시작해야지.”


민준은 자취방에 기대앉아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정말 괜찮지?” 과장되게 밝은 엄마의 목소리 위에 민준의 밝은 목소리가 얹어졌다. 엄마에게는 거짓말을 했다. 당분간은 과외를 할 생각도, 취업을 준비할 생각도 없는데. 취준생이란 타이틀을 벗어버리고 싶었다. 무언가를 준비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 끝없는 길을 걷는 기분, 굳건히 서 있는 벽을 두 팔로 망연히 밀고 있는 기분에 더는 휩쓸리기 싫었다.


대신, 민준은 쉬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중학교 1학년이 시작되고부터 마음 편히 쉬어본 적이 없었다. 한 번 우등생이 되자, 계속 우등생이 되어야 했고, 우등생은 늘 노력해야 했다. 노력하는 게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력의 결과가 이럴 거였으면 노력하지 않는 게 더 나았을 뻔했다. 그렇다고 지난 시간을 후회하긴 싫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또 지금처럼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후회하게 될 것 같았다. 민준은 은행 계좌를 확인했다. 몇 개월은 버틸 수 있는 금액이 찍혀 있었다. 그 순간 결심했다. 통장 잔고에 0이 찍히는 날까지 놀아보자.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아보자. 그래, 그래 보자. 그리고, 그다음은? 그다음은…


'그다음이 어딨어. 그다음은 없는 거야.'


겨울이 끝나갈 무렵, 민준은 백수 생활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백수 생활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 휴대폰은 자기 전에 한 번만(그것도 기억이 나면) 켜보기로 했다. 잊기 전에 텔레콤 회사로 전화해 요금제도 기본 요금제로 바꿔 놓았다. 어차피 민준이 먼저 전화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들에서 벗어나면 어떤 일들을 하며 살게 될지 민준은 궁금했다. 과연 얼마만큼 자연스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일과가 자연스럽게 흘러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닝 알람, 사회적 시선, 부모의 한숨, 끝없는 경쟁, 비교,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 배가 고프기 전까지 가만히 누워 뒹굴거리다가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또 뒹굴거렸다. 창 밖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 대화 소리, 자동차 소리를 제외하곤 민준은 하루 종일 아무 소리도 듣지 않았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잠잠해지자 절로 민준 내부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울컥 억울해지다가, 마냥 낙관하게 됐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횟수가 늘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이.” 민준은 허공에 대고 말했다. 이어서 속으로 문장을 끝맺었다.


'다 취업을 위한 일이었구나.'


민준은 유치원에서 받아쓰기를 백점 맞았던 순간을 기억했다. 선생님은 빨간색 색연필로 ‘100’이라는 숫자를 큼지막하게 써줬다. “민준이, 잘했다”라며 엉덩이도 팡팡 두드려줬다. 민준은 선생님의 칭찬이 왠지 부끄러웠지만 그럼에도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집으로 달려와 공책을 부모님께 펼쳐 보이자 부모님은 아들을 번쩍 들어 올리며 먹고 싶은 게 뭔지 물었다.


“그때부터였던 건가.” 민준은 냉장고에서 달걀 두 개를 꺼내며 말했다.


초, 중, 고등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들. 대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들. 초, 중, 고등학교에서 한 모든 일들. 대학교에서 한 모든 일들. 그 결과물들. 취업을 포기한 이상 이 결과물들이 더는 필요 없게 되었다는 걸 민준은 깨달았다.


'아니, 꼭 그렇다고만 볼 수 없지. 그러니까… 어찌 됐건 영어는 잘하게 됐잖아. 해외여행할 땐 편하겠지. 아, 나 정말 바보 같다. 해외여행을 얼마나 자주 한다고. 그래도… 지나가다 외국인이 길을 물어오면 길은 알려 줄 수 있잖아? 아, 모르겠다. 그냥 영어는 잘 배웠다고 생각하자. 나머지는? 시험 잘 보는 요령? PPT 만드는 능력? 한없이 무거워질 수 있는 엉덩이? 사람이 피곤한 채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자기 자신에게 실험했던 경험? 이게 다 무용지물이 된 건가?'


민준은 그간 해왔던 일들의 가장 뚜렷한 결과물인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해봤다. 여기저기에서 퇴짜 맞은 못난 자신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싫지는 않았다. 실은, 못난 나라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은 적 있다. 열심히만 해선 안 되고 잘해야 한다고. 그런데 누구 기준으로 ‘잘’ 인가. 민준은 민준이 잠을 포기하며 정성껏 만들었던 모양 좋고, 색깔 좋고, 질 좋은 단추들을 생각했다. 민준은 그 단추들이 ‘잘’ 만들어진 단추들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 단추들은 오로지 취업만을 위해 만들어진 단추들이었다. 그래서 속이 상했다. 그렇더라도, 단추를 만들며 보냈던 그 긴 시간을 낭비한 시간이었다고만 생각하긴 싫었다. 내 몸 어딘가에, 내 마음 어딘가에 그 시간을 즐겼던 순간들의 기억도 새겨져 있지는 않을까? 아닐까? 나는 완전히 잘못 살았던 걸까?


민준의 백수 생활은 어느새 꽤 규칙성을 띠고 있었다. 그는 원래 잠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래 자니 오히려 몸이 찌뿌드드해지기만 했다. 알람이 없어도 아침 8시면 눈이 떠졌다. 일어나면 청소를 깨끗이 하고 아침을 정갈하게 차려 먹었다. 통장 장고가 바닥나기 전까진 돈 걱정을 하기 않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민준의 세 끼는 나름 알찼다. 아침엔 빵과 달걀 프라이 또는 스크램블드 에그를 먹고, 점심엔 채소를 곁들인 밥을 먹고, 저녁엔 그날그날 먹고 싶은 음식을 푸짐하게 먹는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꼭 고기를 먹었다.


오전 아홉 시 반이 되면 집을 나섰다. 요가 학원까지 이십 분을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었다. 찌뿌드드한 몸을 풀 겸 시작한 요가가 의외로 잘 맞았다. 처음에는 여기에도 근육이 다 있구나 싶게 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팠는데 이제는 요가를 마치면 몸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민준이 특히 좋아하는 시간은 요가가 다 끝나고 난 뒤 몸을 쭉 펴고 누워 휴식하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잠시 누워 있는 것만으로 몸과 마음의 긴장이 풀린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민준은 이 시간에 설핏 잠에 들기도 했는데 이때 자는 잠이 정말 꿀잠이었다. 요가 강사가 “모두 일어나 앉으세요.”라고 나직한 목소리로 잠을 깨울 땐 몸이 으스스 떨리면서 조금은 몽롱해졌다. 몸이 느슨하게 풀린 채로 이십 분을 걸어 집으로 돌아올 때면 민준은 자기 자신에게 좋은 일을 한 것 같아 잠시 행복해졌다.


행복이 잠시 찾아왔다면 불행도 이어 찾아왔다. 자취방에 앉아 큼지막한 채소쌈을 입에 넣는 순간 어디쯤에 문득 이런 생각이 닥쳐왔다.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채소쌈은 정말 맛있었지만 이런 생각은 정말 맛없었다. 맛없는 건 맛있는 것을 이기지 못한다는 생각에 민준은 또 큼지막하게 채소쌈을 싸서 입에 넣었다. 열심히 씹다 보면 잠시 찾아왔던 불행은 사라지고 다시금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고 민준은 주로 영화를 봤다. 영화 사이사이에 사람들이 인생 드라마라 추천한 드라마를 몰아보기도 했다. <하얀 거탑>도 이제야 봤다. 마지막에 장준혁이 죽을 땐 민준도 꺼억꺼억 울었다. <비밀의 숲>은 놀라면서 봤다. 우리나라 드라마가 이 정도로 발전했구나. 영화는 영화를 전문으로 다루는 인터넷 사이트를 참고하며 세심하게 골랐다. 한 달에 두어 번은 예술 영화관을 찾았다. 성철이가 지금의 민준을 보면 아주 흡족해할 것 같았다.


성철은 영화를 참 좋아했다. 열렬한 영화 덕후로서 시험 기간에도 심야 영화를 즐겨보던 그는 잠을 못 자서 퀭한 눈을 하고는 민준이 맨 치고받고 싸우는 영화만 본다고 타박하기 일쑤였다.


“남이 좋다는 영화를 보지 말고 네가 좋은 영화를 봐.” 하고 말하며 잘난 척하는 성철의 입을 물리적으로 막길 여러 번이었지만 성철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민준이 어떤 영화가 천만 관객을 모았다며 영화관에 다녀오면 성철은 “너란 놈이 원래 그렇지.”라며 인신공격까지 했다.  


“좋은 영화에 천만 관객이 들 수는 있지. 하지만 천만 영화가 다 좋은 건 아니란다. 네가 그걸 모르네. 그런 영화가 천만 영화가 될 수 있던 건, 그 영화가 이미 삼백만 영화였기 때문이야.”


민준이 대꾸하지 않아도 성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늘어놓았다.  


“수백만 관객이 홍보의 노예가 됐다는 말이야. 관객이 삼백 만이 넘어서면 제작사는 ‘이 영화는 삼백 만이 넘었다’하고 홍보를 하지. 그러면 사람들은 ‘오, 이 영화가 삼백 만이 넘었대, 한 번 봐 볼까?’하는 거야. 그러면 곧 사백 만이 넘어. 그럼 또 제작사가 홍보하지. ‘이 영화는 사백 만이 넘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오, 이 영화가 사백 만이 넘었대, 한 번 봐 볼까?’하는 거야. 그렇게 오백 만, 육백 만, 칠백만…”

“시끄러워.”


민준이 성철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너 그거 궤변인 거 모르냐?”

“넌 왜 또 잘난 척이냐?”

“네 말이 이런 뜻인 거잖아. 어떤 영화가 관객수 삼백 만을 모았다는 건 천만 행 프리패스를 얻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그럼 영화 만드는 사람들 목표가 다 삼백 만이겠네? 삼백 만만 들면 다 천만 영화 되니까?”

“야, 됐다. 머리 나쁜 놈. 너는 어떻게 사람이 말을 하면 곧이곧대로 들을 줄만 아냐. 내 말의 요지는 이거잖아. 천만 영화라고 해서 다 천만 관객을 만족시킬 만큼 좋은 영화는 아니다. 그러니 천만 영화라고 볼 게 아니라, 우리 모두,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다 각기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봐야 한다 이거잖아, 응?”

“영화를 보기 전에 내가 그 영화를 좋아하는지 어떻게 아는데?”


민준이 성철을 쳐다보지도 않고 노트에 필기를 하며 물었다.


“포스터만 봐도 알지! 줄거리만 봐도 알지! 감독을 보면 알지! 너 생각해봐. 넌 정말 천만 명이 넘는 우리나라 사람이 조폭이랑 검사가 치고 박는 영화를 그렇게나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냐? 다 그렇게 신파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다 마블 광팬이야? 그냥 남들이 보니까 보는 거 아니야?”


민준은 왜 성철이 영화 이야기만 나오면 이렇게 열을 올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저 열을 식혀줄 사람은 지금 현재 자기밖에 없다는 건 알았다. 민준은 필기를 멈추고 성철을 올려다봤다.


“성철아, 이제야 네가 무슨 말하는지 알겠다.”

“그렇지?”

“너의 말을 모조리 다 이해하겠어. 내가 잘못 생각했어. 좋은 정보 알려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민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과장된 제스처로 성철을 껴안았다. 성철의 기세를 꺾으려는 민준의 의도는 늘 완벽히 먹혔다. 민준이 껴안자 성철은 민준을 더 꽉 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친구야, 나도 고맙다. 날 이해해줘서.”


성철의 말대로 민준 역시 치고 박는 영화가 좋아서 그 영화들을 본 건 아니었다. 성철의 말대로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 줄 몰라서 남들이 좋다는 영화를 본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그 영화를 본 걸 후회한 적도 없었다. 뭔, 후회씩이나. 보는 순간만큼은 재미있었으니까 그걸로 된 거지.


시간 여유가 있으니 민준은 자기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탐구할 수 있었다. 민준은 자기가 뭘 좋아하는 줄 알려면 우선 마음을 탐구할 시간 여유가 있어야 하는 거였다고 성철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차원 높고, 깊고, 미묘한 영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집중력 또한 정신적 여유에서 나오는 거였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중에 만나면 이것도 물어봐야지. 바빠 죽겠다고 노래를 부르면서도 너는 어떻게 그 많은 영화를 다 보러 다닐 수 있었는지. 아무리 바빠도 좋아하는 것 하나쯤은 곁에 두고 살 수 있던 노하우는 뭐였는지.


민준은 영화를 한 편 보면 그 영화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했다. 영화를 음미하느라 하루를 온종일 써버리기도 했다. 목적 없이 한 대상에 이토록 긴 시간을 내어준 적이 전에는 없었다고 생각하면서 민준은 지금 자기가 굉장히 사치스러운 행동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시간을 펑펑 쓰는 사치. 시간을 펑펑 쓰며 민준은 조금씩 자기 자신만의 기호, 취향을 알아갔다. 민준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어떤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결국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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