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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Oct 07. 2019

#11 수세미 이벤트는 무사히

소설 연재

정서가 기증한 수세미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세 사람은 짧은 회의를 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수세미를 기증한 정서의 마음이 예쁘니 수세미로 수익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길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서점에서 수세미 이벤트를 여는 데 세 사람 모두 찬성했다.  


화요일 오후 6시 30분 / 인스타그램 문구

휴남동 서점에서 이번 주 금요일에 이벤트를 엽니다. 서점에 오는 모든 분들 수세미 하나씩 가져가세요! 직접 만든 수제 수세미입니다. 하트, 꽃, 물고기, 식빵 등 다양한 모양의 귀여운 수세미예요. 수량 한정이라 아무래도 선착순이 되겠네요. 헛걸음하지 않게 수시로 수량 업데이트하겠습니다. 금요일엔 휴남동 서점, 그리고 수세미와 함께 :)

#휴남동서점 #동네책방 #동네서점 #동네서점이벤트 #수세미안쓰는사람_아무도없어 #수세미를이벤트로걸다니 #수세미만든사람은누구 #금요일이기다려집니다


금요일 오후 1시 4분 / 인스타그램 문구

오늘 오시면 수세미 드려요. 서점을 찾아주시는 모든 분께 드려요. 수량은 70개 한정이에요. :)

#휴남동서점 #동네책방 #동네서점 #동네서점이벤트 #70개한정수세미가지러오세요 #책안사도드려요


금요일 오후 5시 2분 / 인스타그램 문구

수세미가 이렇게 인기 있을 줄 몰랐어요. 남은 수량 33개. :)

#휴남동서점 #동네책방 #동네서점 #동네서점이벤트 #불금엔수세미


수세미는 생각보다 반응이 좋았다. 정서가 수세미 만드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영주처럼 손님들은 수세미의 귀염성을 넋 놓고 바라봤다. 오늘 영주는 책에 관한 질문보다 수세미에 관한 질문을 더 많이 받았다. 수세미를 사 쓰기만 했지 만들어서 쓰는 건 생각해보지도 못했다는 손님이 대부분이었다. 수세미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는 질문에는 정서가 미리 일러준 대로 알려주었다.


영주는 마음을 간질이는 재미있고 독특한 아이디어에 손님들이 반응한다는 걸 오늘 배웠다. 작고 귀여운 것을 손에 든 기쁨 때문인지 손님들은 기꺼이 돈을 썼다. 책을 사고 수세미를 가져간 손님보다 수세미를 가져가면서 책을 산 손님이 더 많았다. 그렇다고 이런 이벤트를 자주 연다면…, 그럼 반응이 점점 사그라들겠지. 서점 본연의 색깔에 집중하면서 가끔씩 흥미로운 색을 더해야 한다.


이벤트가 무르익던 늦은 오후, 서점엔 네다섯 명의 손님이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드디어 잠시 시간이 났다. 영주는 창가 테이블을 향해 걸어가며 그곳에 앉아 있는 민철을 바라봤다.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창 밖을 보고 있는 모습이 언뜻 새장에 갇힌 아기 새 같았다. 누가 저 아이를 새장에 집어넣었을까. 아이는 알까. 새장 문을 안에서도 열 수 있다는 걸. 영주는 지금 영주가 하려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섬세함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고 느꼈다. 아이가 직접 새장 문을 열도록 도와주는 것. 아이를 움직이게 하는 것.


테이블 위에는 영주가 지난주에 준 <호밀밭의 파수꾼>이 놓여 있었다. 영주가 다가가자 자세를 바로잡는 민철의 분위기로 보아 영주의 추천은 이번에도 실패인 것 같았다. 그녀는 이젠 정말 사회 부적응자 고딩의 독백이 가득한 저 책은 추천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책 안 읽었지? 내용이 별로였어?" 영주가 민철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아, 그건 아니에요. 이 책 좋다는 건 저도 알아요."


민철이 다소곳한 자세로 대답했다.


"어려웠어?"


영주는 괜스레 책을 만지작거렸다.


"서점 이모, 이 책에서 첫 대사가 언제 나오는지 아세요?"


 지난주에 민철은 영주를 서점 이모라고 부르기로 했다.


"언제 나오는데?"


 영주는 멈칫하며 책을 펼쳤다.  


"136 문장 후에요. 소설 시작하고 7페이지째에 나와요."


민철의 목소리는 비 오는 날 비가 온다고 말하는 것처럼 무덤덤했지만 영주는 그 목소리에서 원망의 기색을 읽은 것만 같았다. 민철이 영주의 생각을 눈치챈 듯 주저하며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이런 책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요. 교과서도 겨우 읽는데요."


지난주에 민철이 서점으로 영주를 보러 왔다. 민철 엄마와 민철 사이에 합의가 있었다는 걸 영주는 미리 알고 있었다. 민철이 일주일에 한 번 서점에 들러 영주가 읽으라는 책을 읽는다면 민철이 학원을 안 가도, 집에서 몇 시간이고 뒹굴어도 민철 엄마가 잔소리하지 않겠다는 것이 합의 내용이었다. 이 얘기를 처음 듣고 영주는 강력히 거절 의사를 밝혔다. 부담스러웠다. 아이도, 조카도 없는 영주가 남의 집 교육에 어떻게 관여할 수 있을까. 그러자 민철 엄마가 손을 뻗어 영주의 손을 잡았다.  


"영주 사장이 부담 느끼는 것도 이해해."


민철 엄마는 잡았던 손을 놓고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빨아 마셨다.


"그냥 서점에 오는 손님들 책 추천해 주는 정도로만 생각해주면 어떨까? 나도 딱 그 정도만 바라는 거야. 내가 중간에 끼어서 그렇지 그냥 민철이가 일주일에 한 번 서점에 들르는 고딩이라고 생각해줘. 한 달만 해보자. 딱 네 번만. 그냥 애한테 좋은 책 한 권씩만 추천해줘. 우리말은 도통 듣지를 않아서 그래. 요즘 부모들이 이렇게 무능력해. 자기 애를 어쩌질 못해."


영주는 하루 만에 생각을 바꿔 민철을 만나기로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서점을 찾아오는 고딩이라…. 실제 그런 고딩이 있다면 영주는 부담은커녕 마냥 예뻐하기만 할 것 같았다.


영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들고 의미 없이 페이지를 넘기며 고등학생이 읽을만한 책이 뭐가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그때, 민철이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서점 이모는 제가 저 책을 어떻게든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응?”

“그렇다면 일주일 동안 한 번 더 노력해 볼게요. 익숙하지 않아서 어렵다고 느끼는 걸 테니까요."


또박또박 말을 하는 민철을 보며 영주는 문득 생각했다. 이 아이가 그저 새장에 갇힌 아기 새로만 살고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할 수 있겠어?"

"뭘요?" 민철이 커다란 눈을 크게 떴다.

"읽는 노력."

"하면 하겠죠."

"음... 나는 너무 노력하는 건 별론데."

"노력하지 않는데 원하는 결과가 나올 리가 없잖아요."

"그걸 아는 애가 그렇게 무기력하게 지내?"


영주가 다 들어 알고 있다는 듯 슬쩍 민철을 떠봤다.    


"머리로 아는 것과 행동하는 건 다르니까요."


민철은 아무렇지 않은 듯 영주의 말을 받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영주는 민철에게 정이 갔다. 민철은 어렸을 때의 영주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답답증을 앓고 있지만 원인을 모른다는 것이 그랬다. 어린 영주는 답답증을 풀기 위해 미친 듯이 공부에 전념했다면, 민철은 답답증을 풀기 위해 멈춰 섰다. 어쩌면 민철이 영주보다 더 영리한 몸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지금 민철은 제 몸의 방향키를 점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영주는 이제야 하고 있는 것을.


영주는 일을 하는 사이사이 민철과 대화를 이어갔다. 민철은 창밖을 뚱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영주가 오면 영주를 바라봤다. 그는 피하는 기색 없이 영주가 하는 질문에 찬찬히 답했다. 민철은 영민했고 심지어 유쾌했다. 조심스러운 태도 뒤엔 장난꾸러기 면모도 있었다. 민철과 대화한 끝에 영주는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그게 낫겠어. 영주는 테이블 위로 상체를 기울여 민철과 거리를 좁히면서 말했다.


"우리 작전을 좀 세우자."

"어떤 작전요?"


민철이 다가오는 영주에 당황한 듯 몸을 살짝 뒤로 빼며 물었다.


"책은 읽지 말기로 하자. 대신 일주일에 한 번 여기 와서 나랑 이야기만 해. 너희 엄마가 너한테 책 주라고 주신 돈이 있거든. 그건 한 달 뒤에 내가 엄마한테 돌려드릴게. 우선 한 달 간은 비밀이야. 알았지?"


"그럼 책 안 읽어도 돼요?"


오늘 본 이래 가장 밝은 표정으로 민철이 물었다.


금요일 오후 8시 30분 / 인스타그램 문구

수세미 가지고 가신 분들! 오늘 저녁 사용해보셨나요? :) 수세미 남은 수량 4개. 남은 수세미는 서점 주인장과 바리스타의 부엌에서 사용하도록 할게요. 오늘 하루 저희 서점을 찾아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

#휴남동서점 #동네책방 #동네서점 #동네서점이벤트 #수세미이벤트끝 #오늘도모두수고하셨어요 #좋은밤되세요 #푹쉬는밤되세요



여느 날 같지 않게 민준은 미적거리고 있었다. 퇴근할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행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괜히 영주 쪽을 보며 한 번 닦은 컵을 또 닦고, 한 번 닦은 커피 머신도 또 닦았다. 보아하니 영주는 오늘 야근을 할 것 같았다. 일이 많은 날엔 같이 일을 하고 빨리 집에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민준은 생각했다. 민준도 이제 웬만한 서점 일은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초과 근무를 하겠다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수당엔 칼 같은 사장이니 일을 더 하겠다고 말하는 건 마치 돈을 더 달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결국 망설이다가 민준은 가방을 메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 문득 서서 고민하더니, 뒤로 돌아 영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장님, 오늘 야근하세요?”

“아…, 조금 더 있다가 가야 할 것 같아요.”


영주가 노트북으로 향하던 시선을 들어 민준을 봤다.


“왜요?”

“혹시 일 많으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초과 근무라기보다 제가 오늘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서요.”

“어! 나랑 같네요. 나도 오늘 집에 들어가기 싫어서 남아 있는 건데.”

“정말요?”

“거짓말이에요.”


영주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걱정할 만큼 일 많지 않아요. 이따가 지미 언니가 집으로 오기로 했거든요. 그 전에는 갈 거랍니다. 그래 봤자 한 시간 야근.”


민준은 영주의 말을 잠시 곱씹다가 가볍게 목 인사를 했다.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네, 내일 봐요.”


금요일 오후 9시 47분 / 인스타그램 문구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들 하잖아요. 봄은 여자의 계절이고요. 호르몬의 영향 때문이라고 해요. 가을가을한 요즘, 남자분들 괜찮으십니까! 가을은 식욕이 폭발하는 계절이기도 하죠. 그래서인지 요즘엔 퇴근할 때만 되면 배가 너무 고파요. 그렇다고 마구마구 먹기만 할 수 없으니 쿡방을 보듯 음식이 가득한 소설을 읽습니다. 요즘 제가 읽고 있는 소설은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에요. 책 읽기 전에 동명의 영화를 보시는 것도 강추합니다. :)

#휴남동서점 #동네책방 #동네서점 #배고플땐쿡방소설 #라우라에스키벨 #달콤쌉싸름한초콜릿 #책읽다가저도이제퇴근합니다 #여러분내일봐요


민준이 조금 달라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집 앞에 도착한 영주의 눈에 지미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미의 오른손엔 맥주 캔 여섯들이가 왼 손엔 분명 각종 치즈가 가득 담겼을 종이 봉지가 쥐어져 있었다. 영주가 “언니!” 하고 부르자 지미가 양 손에 아령을 든 사람처럼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영주가 봉지 하나를 건네들었다.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요.”

“많이는 무슨. 어차피 내가 다 먹을 건데.”

“그런데 정말 오늘 자고 가도 돼요?”

“당연히 되지. 그분도 새벽에나 집에 들어갈 거야. 난 이제 정말 모르겠어.”


영주와 지미는 안주를 맛있게 담은 접시를 바닥에 대충 내려놓고 그 양 옆에 사이좋게 모로 누웠다. 맥주를 마실 땐 자세를 바로잡고 앉아 마셨지만 맥주를 마시고 나선 다시 편한 자세로 눕길 반복했다. 영주가 집을 꾸밀 때 무엇보다 신경 썼다던 조명이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두 여자의 모습도 제법 근사하게 꾸며주었다.


“너네 집은 조명만 좋아.”하고 핀잔을 주는 지미에게 영주는 “책도 많은데.”하고 대꾸했다.

“책은 너나 좋지.”하고 또 지미가 핀잔을 주자 영주는 “이 집은 주인도 꽤 괜찮아요.”하고 대꾸했다.

“너도 너나 좋지.”하고 지미가 쐐기를 박듯 퉁박을 주자 영주는 벌떡 일어나 맥주를 들이켜며 대꾸했다.

“언니,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뭐가 또 그런 것 같아?”


지미가 누운 자세로 치즈를 먹으며 눈을 흘겼다. 또, 또 진지해진다, 그만 좀 진지해져라, 하는 표정으로.


“그냥 요즘엔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나라는 존재가 나에게나 좋지 남에게는 정말 영 아니다, 라고요. 가끔은 나라는 존재가 나에게도 썩 좋지 않긴 한데, 그래도 참을 만은 하거든요, 난.”

“너도 참 문제다.”


지미가 팔로 몸을 지탱하며 일어나 앉았다.


“이 세상에 안 그런 사람이 어딨어? 나라고 뭐 남에게 그리 좋은 사람이겠어? 내가 이 생각 하나 붙잡고 지금껏 버텨오고 있는 거잖아. 내가 그 사람을 못 견뎌하는 만큼 그 사람도 날 못 견뎌하는 건 아닐까. 피장파장 아닐까.”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면서 남에게 해도 끼치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엔 있을 거 아니에요?”


영주가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네모난 치즈 껍질을 까며 말했다.


“네가 좋아하는 책 속에는 그런 사람이 있디? 혹시 날개는 안 달렸디?”


지미가 톡 쏘듯 묻고는 다시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네가 저번에 그랬잖아. 소설 주인공은 다 조금이나마 어긋난 사람들이라서 결국 보통 사람을 대변한다고. 우린 다 어긋나 있어서 서로 부딪히다 보면 상처를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거라고. 그렇다는 건 너도 보통 사람이라는 거잖아.”


지미가 독백처럼 말을 이었다.


“우리가 다 그런 거지. 다 해를 끼치고 살지. 그러다 가끔 좋은 일도 하고.”

“그렇네요.”


영주도 천장을 보며 누웠다.


“그런데 언니.”

“응?”

“그때 그 손님 기억나요? 식후 독서한다던.”

“어, 기억나지. 그 사람이 왜?”

“한동안 안 보이다가 며칠 전부터 다시 와서 책을 이어 읽더라고요.”

“그 사람도 참 어지간하다.”

“그래서 어제 책을 읽고 나가는 그분에게 말했어요.”

“뭐라고?”

“몇 장 읽어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긴 시간에 걸쳐 책을 다 읽으면 책이 손상된다고요. 손상된 책은 반품해야 한다고요.”

“그랬더니 뭐래?”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쌩하니 밖으로 나가더라고요. 아무 말도 없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거기에 또 있네.”

“그런데 그 손님이 오늘 온 거예요.”

“너를 해치디?”

“아니요. 지금까지 본인이 읽은 책 포함해서 대충 아무 책이나 막 고르더니 열 권을 사가더라고요. 제 눈은 쳐다도 보지 않으면서요.”

“집에 가서 생각했나 보네. 내가 해를 끼쳤구나 하고.”


영주가 지미의 말에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아참, 언니. 저한테 수세미가 하나 있어요.”

“무슨 수세미?”

”수제 수세미예요. 식빵 모양이라서 무지 귀여워요. 드릴게요.”

”누가 준 건데?”

”우리 서점 단골손님이요. 오늘 수세미 이벤트를 했는데 남은 건 언니랑 저 민준 씨가 나눠 갖는 거예요.”

“민준이는 집에서 밥은 해 먹나?”

“글쎄요.”

“똘똘해 보이니까 밥도 해 먹겠지.”

“똘똘해 보이는 거랑 밥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냥 걔는 밥을 해 먹을 애처럼 보여. 손이 가는 스타일 같지가 않아.”



민준은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한 뒤 영화를 한 편 봤다. 영화를 보면서는 핸드폰 전원을 켜 문자를 확인했다. 별 내용 없는 문자들. 다시 전원을 끄려는 순간 전화가 왔다. 그간 일부러 피해오던 엄마 전화였다. 민준은 영화를 멈춰놓고, 표정을 정리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 엄마.”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돼? 핸드폰은 왜 그렇게 꺼놓니?”

“아르바이트하면서 전화받기 어렵다고 했잖아. 집에 와서 켠다는 걸 깜빡했어.”

“밥은?”

“먹었어.”

“몸은?”

“좋아.”

“일은?”

“일, 뭐.”

“언제까지 아르바이트만 할 거냐고 아빠가 물어보더라.”


민준은 의자에서 내려와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갑자기 짜증이 나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언제까지 아르바이트만 할지를 내가 정하나.”

“그럼 누가 정하는데?”


민준은 목소리를 키우며 대답했다.


“나라? 사회? 기업?”

“너 답답한 소리만 계속할래? 아르바이트만 할 것 같으면 집에 내려오라니까! 내려와서 좀 쉬라는 데 왜 말을 안 들어. 제대로 쉬어야 다시 뛸 힘이 나지!”


민준은 엄마의 말에 머리를 벽에 기대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말을 안 해?”

“엄마.”

“왜?”

“꼭 뛰어야 하나?”

“뭐?”

“난 지금도 괜찮아.”

“괜찮긴 뭐가! 에휴, 엄마가 속상해서 잠이 안 온 지가…. 너 거기서 그러고 있는 거 생각하면, 아주! 너 대학 다닐 때 어떻게 해서든 공부에만 전념하게 했어야 했나 후회가 얼마나 되는 줄 알아? 넌 그때도 괜찮다고만 했어. 난 진짜 괜찮은 줄 알았지!”


엄마의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듣자 민준은 미안해졌다. 그래서 자기는 공부에만 전념하지 못했던 게 후회되는 게 아니라 현명하지 못했던 것이, 이렇게만 하면 무조건 잘 될 것이라고 광신하느라 이 방법이 맞나 고려해볼 만큼 현명할 수 없었던 것이, 하나의 길만 믿고 달려오느라 다른 길도 있음을 헤아려볼 만큼 현명할 수 없었던 것이 후회된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걱정하지 마. 나 잘 지내.”

“에휴, 몰라. 엄마는 너를 믿는데, 마음이 좀 안 좋아서 그래.”

“알아.”

“돈은?”

“있어.”

“돈 떨어지면 전화해. 괜히 마음 졸이지 말고.”

“그런 일 없어.”

“그래, 전화 끊을게. 그리고 전화 좀 켜놔. 알았지?”

“응.”


민준은 엄마와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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