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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Oct 14. 2019

#13 모든 책은 공평하게

소설 연재

몇 년째 보지도 못한 엄마와 마음속으로 다투는 것만으로도 영주는 벅찼다. 그녀는 마음속 파도를 잠재우는데 가진 에너지를 다 쓰고 있었다. 몸을 둔하게 움직이며 어디 아픈 사람처럼 서점을 어슬렁거리던 영주에게 민준의 의기소침은 보이지 않았다. 제 문제에 깊이 함몰돼 있는 사람은 제 아무리 이타적인 사람일지라도 결국 타인에게 무심해질 수밖에 없다.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건 결국 서점 때문이었다. 급하지 않다고 미뤄두었던 일들이 오늘은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이 되었다. 영주는 아침 10시에 출근해 주문 도서를 확인하고, 밀린 장부를 정리하고, 택배 보낼 책들을 추리고, 새로 들여온 책들에 관한 소개글을 작성하고, 그러면서 아직 읽지 못한 이번 주 독서 모임 책을 조급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영주는 언제 굼뜨게 행동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쉴 틈 없이 바쁘게 하루를 보냈다. 해야 할 일을 찾아내 순식간에 척척 해결해내는 영주의 탁월한 능력이 제대로 발휘된 날이었다. 만약 예전에 영주와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이런 그녀를 봤다면 “그럼 그렇지. 사람이 어디 그리 쉽게 변하나.”라며 그녀를 놀려먹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때 영주를 알던 사람들 중 지금 영주가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영주가 바삐 서점 일을 하는 동안 정서는 파란색 목도리를 뜨고 있었다. 영주를 찾아온 민철은 영주를 기다리면서 정서의 뜨개질을 구경했다. 정서는 맞은편에 앉아 뚱한 표정으로 뜨개질을 구경하고 있는 이 교복 입은 친구가 귀엽다고 느꼈다. 할 거 없으면 유튜브나 볼 것이지 얘는 왜 여기 이러고 있는 거지?


“너 이런 거 좋아해?”


정서가 넋을 놓고 뜨개질을 구경하고 있는 민철에게 물었다.


“이런 거요?”


민철이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두 팔을 거두며 정서를 봤다.


“묻고 보니 나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네. 그냥 왜 여기에 있냐는 질문이었어.”

“일주일에 한 번 서점에 와서 서점 이모하고 얘기해야 해요. 그래야 엄마가 잔소리를 안 한대요.”


민철이 순순히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서점 이모는 영주 언니겠고, 엄마가 왜 잔소리를 하는지 묻고 싶진 않고. 뭐, 암튼, 보고 싶으면 계속 봐. 하고 싶으면 말하고.”

“뜨개질요?”

“응. 한 번 해볼래?”


정서가 손을 멈추고 묻자 민철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그냥 구경만 할게요.”

“그럼, 그러든가.”


민철은 다시 두 팔을 테이블 위에 겹쳐 올려놓고 파란색 목도리가 정서의 손놀림에 의해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봤다. 목도리가 움직일 때마다 마치 목도리가 민철 쪽으로 꿈틀꿈틀 기어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서의 손놀림은 일정한 속도로 유지됐고, 민철의 눈도 일정한 속도로 정서의 손을 따라갔다. 민철은 뜨개질하는 걸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20분 동안 집중해서 본 적이 있었다. 산속에서 재료를 직접 구하고, 그 재료를 한 달간 묵히고,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먹음직스러운 음식으로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민철은 그 영상을 몇 번이나 반복해 봤었다. 지금도 딱 그때의 기분이었다. 이게 뭐라고 자꾸 보고 싶었다.


그렇게 계속 정서의 규칙적인 손놀림을 따라가다 보니 마치 최면술사가 회중시계로 민철의 정신을 쏙 빼놓고 있는 것도 같았다. 최면술사가 민철에게 말했다.


“괜찮다, 다 괜찮다.”  


민철은 살짝 졸았다. 그러다가 졸음을 한 번에 몰아내더니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처음 봐요.”

“뭘?”

“뜨개질하는 거요.”

“요즘 다 그렇지.”


민준은 말없이 계속 뜨개질을 구경하다가 다시 정서에게 말을 붙였다.


“이모.”

“나도 이모야?”

“그럼 어떻게 불러드릴까요.”


정서가 뜨개질을 멈추고 생각해봤다.


“너랑 나랑 피 한 방울 안 섞였는데 이모라고 불리기도 애매하네. 그렇다고 누나라고 불리기도 싫고. 아줌마는 더 싫고. 우리나란 이게 문제야. 많고 많은 2인칭 대명사 중에 네가 날 부를 만한 게 없잖아?”

“…”

“뭐…, 영주 언니도 이미 이모로 불리고 있고, 생각해보니 피가 뭐 대순가 싶네. 그래, 우리나란 혈연이란 것도 참 문제야. 내 가족만 잘 된다고 하면 그저 다들 물불 안 가리고 괴물이 돼서 막! 부끄러움도 못 느끼고 그냥 막 다! …아, 그냥 이모라고 불러.”

“네…”

“근데 나 왜 불렀어?”

“저 다음에도 뜨개질하는 거 구경해도 돼요?”


민철이 굉장히 중요한 걸 묻는다는 듯이 간절한 표정으로 말하자 정서는 귀엽다는 듯 민철을 힐긋 쳐다보고는 짐짓 허락해준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자리싸움은 해야 할 거야.”

“왜요?”

“원래 거기 너네 서점 이모 자리거든.”  


영주가 미뤄두었던 일들을 능숙하게 처리하며 서점 일에 몰두하는 동안 민준은 크게 티 나지 않을 만큼 방황하고 있었다. 커피 주문이 없을 때면 어김없이 영주 곁으로 다가와 팔을 걷어붙이고 영주를 도왔고, 영주를 다 도왔다 싶으면 대청소를 하듯 서점 구석구석을 닦고, 에스프레소 머신을 닦고 또 닦고, 컵도 닦고 또 닦고, 카페 테이블 위치를 바꾸고, 책들도 편집증에 걸린 사람이 지나간 것처럼 열을 맞췄다. 영주도 그런 그를 의식하고는 있었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큰 불은 다 껐고 이젠 소소하게 처리할 일만 남았다. 영주는 과일을 깎아 민준과 정서, 민철에게 가져다주고는 자리에 앉았다. 사과를 먹으며 결정해야 할 건 자와할랄 네루의 <세계사 편력>을 과연 몇 권 들여놓아야 할지였다. 영주는 주문한 책은 최대한 반품하지 않았다. 그러니 애초에 잘 판단해 주문해야 했다. 그런데 이번 같이 과거의 통계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경우엔 막연한 추측밖에 할 수 없었다. 이 책을 찾는 흐름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오늘 오후 서점 오픈 시간에 맞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네루의 <세계사 편력> 1권이 있느냐 묻는 전화였다. 있다고 했더니 저녁때 퇴근하면서 받아가겠다며 손님은 이름과 전화번호를 남겼다. 영주는 전화를 끊자마자 얼른 책을 책장에서 빼 와 예약 책을 꽂아 놓는 책장에 옮겨두었다. 무려 2년 만이었다. 책을 들여놓은 지 2년 만에 처음으로 팔렸다!


책이 팔리면 그 책을 또 들여놓을지 말지 고민이 시작된다. 이 책은 고민할 필요 없이 무조건 다시 들여놓고 싶은 책이었다. 그래서 손님이 책을 찾아가면 바로 주문을 넣으려고 생각을 해두었는데, 방금 그 책을 찾는 전화를 또 받은 것이다. 2년 동안 한 권도 안 팔린 책이 하루에만 두 권이 팔린 거야, 하고 영주는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급히 자리에 앉아 인터넷 창에 ‘세계사 편력’을 검색해 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예능에서 이 책이 언급됐다는 기사가 떴다.


가끔 있는 일이었다. 어느 드라마에서 어느 주인공이 읽던 책, 어느 예능에서 어느 유명인사가 언급한 책, sns에서 어느 연예인이 들고 있던 책. 이런 식으로 홍보된 책은 아무래도 찾는 손님이 늘었다. 때론 이렇게 홍보된 책이 반짝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책은 ‘발견성’이 중요하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텔레비전을 보던 시청자가 어떤 책을 발견해 그 책을 읽게 되었다면, 그 책이 어떤 책이냐는 차치하고, 영주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점을 운영하는 입장에선 새롭게 발견된 그 책 때문에 난처해질 때가 있었다. 어느 드라마에서 어느 주인공이 읽었다고 해서, 어느 유명인사가 그 책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 책을 휴남동 서점에 무턱대고 들여놓을 수는 없었다. 영주는 책을 입고할 땐 다음의 세 가지를 주요 기준으로 따졌다. ‘1. 그 책은 좋은 책인가. 2. 그 책을 팔고 싶은가. 3. 그 책은 휴남동 서점과 잘 어울리는가.’ 딱 보기에도 정성적인 기준이라서 아마 다른 사람들이 볼 땐 ‘사장 마음대로’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영주에겐 매우 중요한 기준이었다. 영주가 서점 일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평소에는 책을 들여놓는 기준을 두고 큰 고민을 하진 않는다. 정말이지 ‘사장 마음대로’ 들여놓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처럼 크게 이슈 된 책이나 베스트셀러 책을 놓곤 어쩔 수 없이 고민이 됐다. 그럴 땐 이번만 ‘4. 그 책은 잘 팔리겠는가’를 추가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영주가 팔고 싶은 책과 잘 팔릴 책이 같지 않을 때가 있었다. 4번의 유혹은 꽤 강렬해서 서점 오픈 초반엔 거센 물살에 밀려 어딘지 모를 땅에 불시착한 사람처럼 막막한 마음으로 책을 들여놓을 때도 있었다.


“땡땡땡 책 있나요?”

“아니요, 저희는 없어요.”


“저희는 없어요.”하고 대답하기 지쳐갈 즈음 울며 겨자 먹기로 책을 들여놓았고, 역시나 그 책은 잘 팔렸다. 그런데 영주가 문제였다. 그 책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먹기 싫은 음식을 억지로 먹을 때면 그 음식이 철저히 미워지듯, 그 책이 미워지기까지 했다. 그래서 굳세지기로 결심했었다. “저희는 없어요.”하고 수십 번, 수백 번 말해도 끝까지 지치지 않기로. 대신 손님들이 휴남동 서점에서 생각지도 못한 책을 ‘발견’해 낼 수 있도록 좋은 책을 열심히 들여놓자고.


이제는 아무리 잘 나가는 책이라 해도 영주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 책을 들여놓지 않는다. 들여놓았다고 해도 그 책에 더 좋은 자리를 내주지도 않는다. 어느 책이든 자기에게 잘 어울리는 자리가 있다고 믿고, 그 자리를 잘 찾아주는 게 영주의 몫이라고 생각해서다. 책을 들여놓을 땐 어쩔 수 없이 공평하지 않지만, 들여놓은 책은 공평하게 팔고 싶다. 실제 한동안 팔리지 않던 책이 자리를 바꾸면 놀라운 속도로 팔리기도 한다. 동네 서점은 큐레이션이 전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 고민이다. <세계사 편력>은 몇 권 들여놓아야 할까. 우선 두 권. 위치는 원래 꽂혀있던 그 자리다. 당장은 아니지만 추후에 이 책을 다른 역사서들과 함께 묶어 이벤트를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사 편력>은 기존의 유럽 중심 세계관에서 벗어나 제3세계의 시선을 담아 의미 있는 책이니, 역사를 다양한 시선으로 보게 해 줄 다른 책들과 함께 이벤트를 하면 손님들이 호응해줄지도 몰랐다. 이벤트에 적합한 매대는 두 번째 줄 세 번째 매대로 정했다. 서점을 연 이래 묵직하면서도 긴 호흡으로 읽어야 할 책들은 주로 그 매대에서 이벤트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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