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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보름 Oct 17. 2019

#14 화음 또는 불협화음

소설 연재

엄마 전화를 받은 후부터 민준에게선 일상의 열의가 사라졌다. 집에 있을 땐 맥없이 누워있었고, 요가 자세 또한 흐트러졌다. 커피를 내릴 때만 간신히 정신을 붙들었다. 죄의식이 열의를 압박하고 있었다. 민준은 자신이 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있는 것만 같아 괴로웠다. 그날 엄마의 목소리는 마치 민준이 지금 잘못 살고 있다고 책망하는 듯했다. 아니, 아닐 것이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이렇게 한 방에 무너질 걸 어떻게 지금껏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었는지 민준 스스로도 의아했다. 그간 무리하지 않고 살았다. 알맞게 벌었고 알맞게 썼다. 가끔 외로웠지만 서점 일을 시작하고부터는 언제라도 이야기 나눌 상대가 있다는 생각에 외로움에 발목 잡힌 적은 없었다.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어렸을 적부터 꿈꾸었다던 영주의 말을 민준도 이해하기 시작했다. 민준도 일터에 들어서면 편안함을 느꼈다. 영주 또한 좋은 고용주였다. 가끔은 사장이 너무 옆집 누나 같아서 민준은 자기가 지금 일터에 나와 있다는 사실도 잊곤 했다.


일터에 오면 해야 할 일이 있고 민준은 그 일을 잘했으며 심지어 그 일은 창의적이기까지 했다. 지미의 말처럼 원두는 무한대의 경우의 수로 블랜딩 할 수 있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식으로 재배해도 원두 맛은 달라지고, 같은 원두라도 커피 맛은 달라진다. 자연이 하는 일이라서 그렇고,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그렇다. 책을 읽는 일과 커피 내리는 일은 비슷한 점이 꽤 있는 것 같았다.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 그렇고, 하면 할수록 더 빠져든다는 점이 그렇고, 한 번 빠져들면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점이 그렇고, 점점 더 섬세함이 요구된다는 점이 그렇고, 결국 독서의 질과 커피의 질을 좌우하는 건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점도 그렇다. 결국 독서가와 바리스타는 독서하는 그 자체, 커피 내리는 그 자체를 즐기게 되는 듯했다. 민준은 일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민준은 열흘 째 고트빈에도 들르지 못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가며 예전처럼 원두를 배달받았다. 원두를 갖고 일부러 들른 고트빈 로스터는 민준과 잡담을 하다가 일어서며 슬쩍 농담을 했다.


“민준 씨가 없으니까 대표님 남편 얘기 우리가 다 받아줘야 하잖아요. 남편이 또 무슨 일 저질렀나 봐요.”


민준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대표님이 민준 씨가 좋아하는 향으로 원두 블랜딩해 놨다니까 테스트하러 와요.” 민준은 뜸을 들이다 “네.”하고 대답했다.


차라리 노력했던 모든 것이 완전히 끝이 났다고 생각하던 그때가 더 나았다. 그때는 오히려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 포기할 수 있었다. 노력에도 임계점이 있다면 이미 임계점을 넘은 상태였으니까. 혹시 더 노력했다면, 한 번 더 시도했다면 될 수도 있었을까, 나는 그때 99도에 도달해 있던 걸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99도에서 100도가 되는 데 필요한 건 노력이 아니라 운이라는 생각이 뒤따랐다. 내게 운이 없다면, 나는 내내 99도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어야 했겠지.


영화를 보면서 민준은 단순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영화 속 인물들은 늘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그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거였다. 영화를 이끌어 가는 동력은 등장인물의 선택에 있었다. 그렇다는 건 우리 삶 또한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우리 삶을 이끄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우리의 선택인 것이 아닐까.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민준은 문득 자기 역시 그때 포기를 한 것이 아니라 선택을 한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을 벗어나겠다는 선택.     


얼마 전에 본 다큐멘터리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를 보면서도 이런 생각은 이어졌다. 세이모어 번스타인 역시 피아니스트의 삶을 포기했던 것이 아니라 피아니스트가 아닌 삶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화려한 명성을 쌓던 세이모어가 피아노를 치는 대신 피아노를 가르치고자 선택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여든 살이 넘은 세이모어는 그때의 그 선택을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고 말했다.


이 영화를 봤을 때만 해도 민준은 세이모어 번스타인처럼 자신 역시 그때의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민준에게 필요한 건 이런 다짐이 아니었다. 민준에게 지금 필요한 건 용기였다. 자신에게 실망한 사람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가 한 선택을 밀고 나갈 굳은 용기.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영주에게 말을 한 그날부터 민준은 진짜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다. 싱숭생숭한 마음은 혼자 있을 때 더 부풀었다. 민준은 오늘도 미적거리다 퇴근 시간이 넘어서까지 서점에 남았다. 뭔가 잘 안 풀리는 표정으로 노트북을 째려보고 있는 영주는 아직 민준이 서점에 남아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민준은 어깨를 돌리고 허리를 좌우로 스트레칭하며 서점을 돌아다니다가 한 번씩 영주를 봤다. 카페 테이블을 툭툭 치기도 하고 괜스레 문도 열어 봤다. 싸늘한 가을바람이 한순간에 서점 안으로 밀고 들어와 급히 문을 닫는 소리에, 드디어 영주가 민준을 봤다.


“어! 민준 씨 아직 퇴근 안 했어요?”


민준이 영주에게로 슬슬 다가오며 말했다.


“퇴근한 거예요. 퇴근하고 집 근처 서점 둘러보는 중이에요.”


민준의 농담에 피식 웃은 영주는 요즘 민준의 “글쎄요.”라는 대답이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하며 노트북에서 손을 떼고 말했다.


“제 생각엔, 아마 그 동네 서점이 지금쯤이면 문을 닫았을 거예요. 문 닫은 가게에 그렇게 막 들어가고 그러면 안 돼요.”


민준은 곁에 있는 의자 등받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다가 결심했다는 듯이 의자를 들고 영주 옆으로 다가왔다.


“혹시 제가 방해될까요?” 민준이 서서 물었다.

“또 집에 가기 싫어요?” 영주가 의자의 좌판을 툭툭 쳤다.

“요즘 자주 그래요.” 민준이 영주 옆에 나란히 앉으며 슬쩍 노트북을 건너다봤다. 

“일이 많으세요?”

“다음 주 북 토크 질문 뽑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좌절 중이에요.”

“뭐가 잘 안 되세요?” 민준은 이제 대놓고 노트북 화면을 바라봤다.

“앞으론 사심을 줄이고 책 내용으로만 작가를 초대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에요.”

“무슨 말이에요?” 민준이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며 물었다.

“책을 읽어보지도 않고 출판사에 북 토크를 제안했거든요. 작가님 승낙을 받고 읽기 시작했는데 내가 문장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깨달은 거예요. 모르는 걸 어떻게 물어요. 머리를 짜고 또 짜내서 지금 질문 12개 만들었어요.”


민준은 영주가 가리키는 숫자 12를 힐끗 보고 나서 노트북 옆에 엎어져있는 책을 봤다. 책에는 정직한 글씨체로 <문장 잘 쓰는 법>이라고 쓰여 있었다.


“읽어보지도 않은 책의 저자를 왜 초청하셨는데요?” 민준은 책을 살펴보며 물었다.

“음…, 작가가 매력적이어서?”

“어떤 매력요? 잘 생겼어요?”

민준이 책을 내려놓고는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그냥… 글이 신랄하달까, 글에서 착한 척 굴지 않아 좋아하는 작가예요.”


민준이 검색창에 현승우를 입력해 넣었다.

 

“솔직해서 좋다는 말인가요?”


민준이 핸드폰으로 남자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영주는 피식 웃고는 모니터에 13을 적어 넣었다. 짧게 이어진 대화 끝에, 둘은 말없이 서로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영주는 13이라고 쓰인 숫자를 바라보며 자기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고, 민준은 서점을 둘러보며 지금 자기가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 과연 합당한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드디어 영주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몇 번 반복한 끝에 질문이 하나 완성됐다.


'13. 살면서 어디까지 솔직해져 보셨나요?’


‘이게 무슨 소리야!’ 영주는 백스페이스를 길게 눌러 질문을 지웠다.


‘13. 제가 쓴 글에서도 비문을 찾으신 적 있나요?’


‘내 글을 읽어봤을 리가 없지!’ 영주는 또 백스페이스를 길게 눌러 질문을 지웠다. 영주는 열이 확 올라오는지 냉장고에서 스파클링 워터 두 개를 가져와 하나를 민준에게 건넸다. 엉겁결에 스파클링 워터를 받아 든 민준은 멍하니 저 멀리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민준을 보며 영주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민준은 스파클링 워터의 뚜껑을 따고 나서도 몇 초쯤 지나 입을 뗐다.


“사장님 하고 뭐라도 말하고 싶어서 앉긴 했는데, 말하기가 쉽지 않네요.”

“민준 씨 원래 말 없지 않죠?” 영주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물었다.

“말이 없다는 소리는 사장님하고 고트빈 사장님한테 처음 들었어요.”

“아, 정말! 정말 그런 거였구나!”


영주가 갑자기 큰 목소리를 내자 민준이 깜짝 놀라며 영주를 봤다.


“지미 언니랑 그런 얘기 나눈 적 있어요. 민준 씨가 말이 없는 건 우리가 아줌마라서 그런 거라고요. 내가 그때 그럴 리가 없다며 얼마나 확신에 차 말했는데! 그런데, 정말이네?”


영주가 민준을 향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민준이 황당해하며 눈을 바짝 떴다.


“더군다나 사장님이 무슨 아줌마예요. 저랑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정말이죠?”

“그럼요….”

“믿을게요. 나를 위해.”


영주의 장난에 민준은 긴장이 풀렸는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저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개인적인 질문이에요.”

“뭐요?”

“사장님 부모님은 어디 사세요?”

“우리 부모님? 서울에 사세요.”

“그래요?” 민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좀 이상하죠? 딸이 서점을 한다는 데 한 번 찾아오지도 않지, 딱 보니까 전화도 없는 것 같지, 그렇다고 쉬는 날 만나는 것 같지도 않지, 그래서 어디 해외나 먼 지방에라도 사나 싶었는데 서울에 산다네, 이상하다, 뭐 이런 생각인 거죠?”


민준은 자신의 반응이 적절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부모님이 내가 보기 싫대요. 특히 엄마가.”

“…”

“내가 평생 안 썩이던 속을 한 방에 와장창 썩혀 드렸거든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착한 딸 콤플렉스에서 일찍 벗어났어야 했어. 엄마 면역력 안 키워준 내 잘못이다 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어요.”


엄마를 생각할 때면 늘 그렇듯 순식간에 굳어지려는 표정을 정리하며 영주가 물었다.   


“그런데 부모님은 왜요?”


민준이 뜸을 들이다 말했다.


“며칠 전에 엄마 전화를 받았어요. 제가 핸드폰을 꺼 놓고 살아서 정말 오랜만에 통화가 된 거예요.”

“핸드폰은 왜 꺼 놓고 있어요?”

“사람들하고 연결돼 있는 게 부담스러워서?”

“흐음, 그렇구나. 엄마랑 무슨 얘기했는데요?”

“별 얘기 안 했어요. 엄마는 저 걱정하고, 저는 엄마더러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엄마는 얼른 제대로 된 일 찾으라고 하고, 저는 알아서 하겠다고 하고.”

“흐음, 그렇구나.”


지연을 힐긋 본 민준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엄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지금 이 일이 제대로 된 일이 아니라는 건 아니에요.”

“무슨 말인지 알아요.”

“엄마는 제가 지금 무슨 일 하는지도 몰라요.”

“설명 안 해도 돼요.”

“... 네... 그런데 지난 며칠간 제가 저에 대해서 하나 알게 된 게 있어요.”

“뭔데요?”

“어른인 척 살고 있었는데 실은 어른이 아니었더라고요. 엄마 말 한마디에 지금 무지 위축된 상태예요. 보이지도 않던 장애물에 걸려 넘어진 기분이 들어요. 문제는, 일어날 순 있겠는데 일어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부모님이 나한테 실망하면 어쩌지, 앞으론 다시 부모님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그래서 여기서 훌훌 털고 일어나는 게 부모님에게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내가 지금 살아가는 삶이 부모님이 내게 원하던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네... 그래서 요즘 전 난 독립적인 개인으로 살기엔 너무 유약한 인간이구나 하면서 스스로한테 실망하고 있는 중이에요.”

“독립적인 개인이 되고 싶어요?”

“어렸을 적에 막연하게 꾼 꿈이었어요.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저는 특정 직업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어요. 의사든 변호사든 딱히, 별로요. 성공하거나, 유명해지거나 그런 걸 바란 적도 없고요. 뭐, 그냥, 안정적으로 살면 좋겠다 정도. 인정받으면 좋겠다 정도. 그러면서 막연히 꿈꾸던 게 독립적인 개인이 되고 싶다는 거였어요.”

“멋있네요, 그런 꿈.”

“전혀요. 제대로 꿈을 꿀 줄도 몰랐던 것 같아요.”


영주가 스파클링 워터 병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내 꿈은 서점을 하는 거였어요.”

“그럼 꿈을 이루신 거네요.”

“그렇긴 한데, 꿈을 이뤘는데, 왜 꿈을 이룬 것 같지 않은지 모르겠어요.”

“왜요?”

“만족하긴 해요. 그런데 그냥… 꿈이 다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요. 꿈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꿈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꿈을 이뤘다고 마냥 행복해지기엔 삶이 좀 복잡하다는 느낌? 뭐 그런 느낌이에요.”

“네….”


민준은 신발 끝을 바라보며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마냥 행복해지기엔 삶이 좀 복잡하다는 느낌. 영주가 한 말을 곱씹어봤다. 삶은 원래 복잡한 것. 어쩌면 민준은 원래 복잡한 삶을 단순 명료 깔끔하게 정리하려 해, 요즘 이렇게 괴로운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띄엄띄엄 말이 이어지며 영주는 15번째 질문을 완성했고, 민준은 여전히 영주 옆에 앉아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사장님, 혹시 다큐멘터리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라고 들어보셨어요?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모르실 것 같긴 해요.”


영주가 숫자 16을 노려보다가 민준의 질문을 받고는 눈동자를 위로 치켜떴다.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라… 아, 시모어 번스타인이요?”

“세이모어, 시모어, 같은 사람인가요?”

“책이 있어요.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이라는. 아! 그 책이 다큐멘터리를 찍고 그 후의 이야기를 담은 건데, 그 다큐멘터리를 말하는 건가 보네요. 아니요, 난 못 봤어요. 한 번 보고 싶긴 했는데. 그런데 왜요?”

“그 할아버지가요. 세이모어 할아버지요. 영상에서 이런 말을 해요. 음악에서 화음이 아름답게 들리려면 그 앞에 불협화음이 있어야 한다고요. 그래서 음악에선 화음과 불협화음이 공존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인생도 음악과 같다고요. 화음 앞에 불협화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인생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거라고요.”

“좋은 말이네요.”

“그런데 오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슨 생각이요?”


민준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잠시 뜸을 들이다 고개를 들며 영주를 봤다. 


“지금 살아내고 있는 이 순간의 삶이 화음인지 불협화음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있을까. 내가 화음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불협화음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어떻게 알까.”

“음…, 정말 그러네요. 지나가고 있을 땐 잘 모르기도 하니깐. 뒤돌아봐야 알게 되기도 하죠.”

“그러니까요.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충분히 알겠는데, 그렇다면 궁금하더라고요. 나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

“어떤 상태 같아요?”


어느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민준이 조금은 착잡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 화음 같은데, 사람들은 불협화음으로 볼 것 같아요.”

“그럼 저는 지금 민준 씨의 화음 같은 삶을 보고 있는 거네요?”


민준이 씁쓸하게 웃었다.


“제가 맞는다면요.”

“맞을 거예요. 분명 그럴 거예요.”  


두 사람은 함께 창문 밖을 바라봤다. 서점이 뿜은 빛이 골목길을 포근히 감싸주고 있었다.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몇 사람은 급히 걸어가면서 서점을 의식한 듯 서점 쪽을 힐긋 쳐다봤다. 영주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부모님하고의 관계는… 그냥 이렇게 생각하면 편하더라고요.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사는 삶보단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게 더 맞지 않을까. 안타깝지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한테 실망하는 건. 하지만 그렇다고 평생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살 수는 없잖아요. 저도 한동안 후회 많이 했어요. 그러지 말걸, 말 들을걸. 그런데 이런 후회도 어차피 돌이킬 수 없으니까 하는 거더라고요. 과거로 돌아가면 똑같이 행동했을 테니까요.”


영주가 여전히 골목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그러니, 받아들이기. 자책하지 말기. 슬퍼하지 말기. 당당해지기. 나는 몇 년째 이 말들을 중얼거리며 정신 승리 중이랍니다.”


영주의 말에 민준이 입 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저도 그거 해봐야겠어요. 정신 승리.”


영주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네, 해봐요. 자기 자신에게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능력도 우리에겐 필요하답니다.”


민준은 방해는 여기까지 하겠다고 말하고는 의자를 들고 일어났다. 문 쪽으로 걸어가면서는 머뭇거리는 말투로 너무 늦지 않게 퇴근하라고 영주에게 말했다. 민준의 말이 고마웠던 영주는 팔로 큰 원을 그렸다. 민준은 서점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가며 영주가 한 말을 되새겼다. 자기 자신에게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능력이라.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빛이 둥글게 휴남동 서점을 지켜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영주가 동네에 서점이 있으면 좋은 이유라며 다섯 가지를 말해줬는데 민준은 동네에 서점이 있으면 좋은 여섯 번째 이유를 지금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서점을 밖에서 바라보는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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