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보름 Sep 19. 2019

#6 서점, 휴식 시간

소설 연재

손님 맞으랴, 커피 내리랴, 구입 책 목록 작성하랴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가도 어느덧 고개를 들면 할 일도, 손님도, 커피 내릴 필요도 없는 시간이 찾아온다. 서점엔 영주와 민준 둘뿐이다. 영주는 이 시간을 악착같이 활용해 어떻게든 휴식 시간을 만든다. 흐트러진 책들이 눈에 보여도 매대로 걸어가 책을 정리하는 대신 싱크대로 걸어가 과일을 깎는다. 접시에 과일을 깎아 민준에게 갖다 주면 민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방금 내린 커피를 준다.


이후에 흐르는 정적. 영주는 이제 이 정적이 편안하다. 한 사람과 한 공간에 함께 있는데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쁘기까지 하다. 하고 싶은 말이 없는데도 말을 한다는 건, 물론 상대를 배려하는 태도일 수 있다. 하지만 상대를 배려하느라 자기 자신은 배려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억지로 있는 말 없는 말 다 꺼내놓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공허해지고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든다.


영주는 민준과 한 공간을 사용하며, 침묵이 나와 타인을 함께 배려하는 태도가 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어느 누구도 상대의 눈치를 보며 일부러 말을 지어낼 필요 없는 상태. 이 상태에서의 자연스러운 고요에 익숙해지는 법 또한 배웠다.


10분이 될지, 20분이 될지, 30분이 넘을지도 모르는 정적의 시간에 민준이 하는 일은 늘 거기서 거기다. 영주는 민준이 핸드폰으로 뭘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이력서에 적어 넣은 핸드폰 번호가 있지만, 아직 한 번도 민준과 통화해본 적도 없다. 가끔은 책을 읽기도 하던데 책 읽는 걸 그리 좋아하는 듯 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남는 시간엔 무슨 실험실 연구원처럼 원두로 이것저것 해볼 뿐이다.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저러는 건가 싶긴 하지만 커피 맛이 점점 좋아지는 걸 보니 나름 진지하게 실험에 몰두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민준은 얼마나 말이 없는가’라는 주제라면 영주와 온종일 수다를 떨어줄 의향이 있는 사람이 있다. 휴남동 서점에 원두를 공급하는 로스팅 업체 대표 지미다. 영주가 아는 커피에 관한 모든 지식은 지미에게서 왔다. 농담하는 걸 좋아하는 영주와 농담 듣는 걸 좋아하는 지미는, 처음부터 죽이 잘 맞았다. 열 살 넘는 나이 차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처음엔 주로 지미가 서점으로 놀러 왔는데, 언젠가부터는 영주의 집이 두 사람의 아지트가 됐다. 영주가 서점 문을 닫고 집에 도착하면,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지미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난다. 지미의 양 손엔 늘 먹을거리가 가득했다. 두 사람은 아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됐다. 맥락 없는 이야기가 시작돼도 상대방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받았다. 문득 대화가 끊겼다가도 어느새 다시 대화가 시작됐다. 한 사람이 길게 이야기의 주도권을 잡는다기보다 핑퐁 치듯 짧은 문장들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언젠가 영주 집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며 ‘민준이 얼마나 말이 없는가’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다.


“걔가 말이 없긴 없지. 난 처음에 무슨 인사봇인 줄 알았잖아. 인사만 해서.”


지미는 잠시 집중해서 오징어를 씹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신기한 게, 대답은 잘해.”

“아, 그러네요!”


영주가 이제야 알았다는 듯 오징어를 입에 문 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민준 씨 대답은 잘해요. 아,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민준 씨랑 얘기할 땐 이상하게 답답하지가 않은 거예요. 반응이 있어서 그런 거였네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민준이만 그렇게 말이 없는 것도 아니야.”


지미는 오징어를 계속 씹으며 말했다.


“남자들 다 그래. 결혼하면 말이 없어져. 나는 지금 이 결혼 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있다는 의미의 침묵이지.”


영주는 권태를 침묵으로 이겨내려 애를 쓰는 남편들의 이미지를 어렴풋이 떠올려보다가, 말없는 민준 때문에 어떤 생각까지 했었는지를 털어놨다.


“처음엔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저렇게 말이 없나 싶었어요. 내가 그 정돈가 싶었다니까요.”

“안 어울리게 웬 피해의식이야? 미움 많이 받고 살았어?”

“음, 그렇다기보단… 사람들하고 어울릴 틈이 없었다고나 할까. 그게, 이런 느낌이었어요. 혼자 하이힐 소리 딱딱 내며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어느 날 주위를 둘러보니 내 주변 사람들도 다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쉭쉭 지나쳐가고 있더라고요. 내 귀에 대고 “이것 좀 먹어볼래? 이거 되게 맛있어!” 하고 말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 있죠. 이거, 미움받았던 건가요?"

“미움받았네.”

“아, 그런 거였어!”


영주가 과장해서 한숨을 쉬자, 지미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씹던 오징어를 입에서 급히 뺏다.


“헉, 그런 건가?”

“뭐가요?”

“혹시 민준이 얘 우리가 아줌마들이라서 말 안 하는 거 아냐?”

“그럴 리가… 민준 씨랑 저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영주는 애교를 부리듯 양 손을 쫙 펴선 지미 얼굴 가까이 들이대더니 엄지 손가락 두 개를 쏙 접었다.


“여덟 살?” 


지미는 손바닥을 쫙 펴고 있는 영주가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그럼 민준이가 서른이 넘은 건가?”

“서점에 처음 왔을 때가 서른이었어요.”

“그렇구나. 그래, 여덟 살 차이면 아줌마는 아니지. 그런데, 민준이 좀 달라진 거 같은데 자긴 못 느꼈어?”

“뭐가요?”

“요즘 말이 조금 늘었어.”

“그런가?”

“응, 이젠 이것저것 먼저 물어보기도 하드라.”

“그래요?”

“우리 애들하고도 웃고 떠들더라고.”

“오, 그래요?”

“귀여워.”

“귀여워요?”

“귀엽잖아. 떠들썩하지 않게 뭔가에 골몰하고 있는 모습이.”

“뭔가에 골몰...”

“난 그게 뭐든 집중하고 있는 애들 보면 그렇게 귀엽더라. 귀여우니 잘해주고 싶고.”



민준은 처음엔 영주가 왜 이렇게 맨날 과일을 주나 싶었지만 이젠 잠자코 받아먹는다. 주전부리할 쿠키나 배가 고프면 먹으라고 사놓는 빵처럼 과일 역시 영주가 나름 고심해서 준비한 직원 복지의 일환일 거라고 민준은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 먹다 보니 별로 좋아하지 않던 과일을 이젠 하루라도 안 먹으면 아쉬울 지경이 됐다. 쉬는 날엔 일부러 나가 과일을 사 먹기까지 한다. 습관이란 게 이렇게 만들어진다.


영주가 민준에게 과일을 준다는 건 영주가 이 시간을 휴식 시간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때론, 쉴 준비를 실컷 다 해놨다가 과일 한 조각 먹지 못하고 손님을 맞기도 하지만, 오늘은 과일을 다 먹어도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있고 벌써 이십 분째 여유롭다. 이런 시간이 오면 영주는 천천히 과일을 먹으며 옆에 쌓아둔 책 중 하나를 고른다. 그러고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생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마치 활자에 온 몸을 기대듯 책을 읽는다. 그렇게 책을 읽다가는 고개를 들고 초점 없는 눈으로 생각에 잠긴다. 얼핏 보면 멍을 때리는 것 같기도 한데, 또 그렇지만도 않다고 느끼는 게 멍을 때리던 끝에 뜬금없이 민준에게 뭔가를 물어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민준 씨는 지루한 삶은 버려야 하는 삶이라고 생각해요?”


오늘도 영주는 손바닥으로 턱을 괸 채 민준을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처음엔 저건 어쩌면 혼잣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는데, 이제 저건 혼잣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민준도 잘 안다.


“왜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하루아침에 지금 이곳에서의 삶을 버리고 다른 삶으로 떠나는 사람들. 도착한 곳에서 그 사람들은 행복할까요?”


영주가 이번엔 민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오늘도 역시 대답하기 까다로운 질문이다. 왜 영주는 매번 이런 질문을 할까. 너무 오래 대답을 안 하면 예의에 어긋나는 듯해 민준은 우선 이렇게 대답하고 봤다.


“글쎄요.”


영주가 뭘 물을 때면 민준의 대답은 주로 네, 와 글쎄요,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한다. 어쩔 수 없다. 도대체 그 사람들이 도착한 그곳에서 행복할지 불행할지 내가 어떻게 안 단 말인가.


“제가 읽고 있는 소설에서요. 소설 주인공이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요. 다리 위에서. 어딘가 묘해 보이는 여자를. 그 만남이 계기가 돼서 스위스에 살던 남자가 포르투갈로 열차를 타고 떠나는 거예요. 여행이 아니라 영영. 그냥 궁금해서요. 그 남자의 삶은 지루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았거든요. 조용히 탁월한 사람들 있잖아요. 세상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아도 아는 사람들은 알아주는 그런 탁월함. 그런 탁월함으로 잘 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평생 그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하루아침에 스위스를 떠나는 거예요. 도착한 포르투갈에서 그는 뭘 찾을 수 있을까요. 그는 그곳에서 행복할까.”


평소엔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보이는 영주가 책을 읽을 땐 뭔가, 그래 쫌 뭔가, 뜬 구름 잡는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 민준은 재미있었다. 마치 한 눈을 뜨고 꿈을 꾸는 사람처럼 영주는 눈 하나로는 현실을 보고 눈 하나로는 꿈의 세계를 보는 사람 같았다. 얼마 전에 영주는 민준에게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했다.


“민준 씨는 삶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네?”

“전 없다고 생각해요.”

“…”

“없으니까 각자 찾아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한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이 찾은 의미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고요.”

“…네.”

“그런데 못 찾겠어요.”

“… 뭘요?”

“의미요. 어디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까요. 내 삶의 의미는 사랑에 있을까? 아니면 우정일까? 책일까? 서점일까? 어렵네요.”

“…”

“찾고 싶다고 해서 금방 찾아지진 않을 거예요. 그렇겠죠?”


민준이 대답 없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영주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무려 내 삶의 의미를 찾는 건데 그렇게 쉽게 찾아지겠어요? 그런데 꼭 찾고 싶은데…. 흐음…. 못 찾는다면…, 아무래도 내 삶엔 의미가 없는 게 되는 거겠죠?”


이게 무슨 말일까.

 

“…글쎄요.”


어차피 영주는 민준에게 대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빙빙 도는 생각을 질문을 통해 정리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얼쑤’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않는 대답을 매번 하는데도 민준에게 핀잔 한 번 주지 않은 걸 테다. 한 번씩 구름 속에서 몽롱하게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씩씩하게 현실 맞춤형으로 살아가는 것이 영주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는 걸 민준은 조금씩 이해해갔다.


그런 영주 옆에서 민준도 이따금 영주처럼 생각에 잠겼다. 생각의 끝에서 막연한 꿈같은 데 가닿기도 했다. 장래 희망이나 목표로 전환되는 꿈이 아니라 진짜 꿈. 남자가 포르투갈 행 열차를 타고 갈 때, 그 남자를 움직이게 했던 그런 꿈. 민준은 그 남자가 도착한 곳에서 행복했을지 불행했을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는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누군가에겐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오늘의 삶과 완전히 다른 내일의 삶.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내일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그 남자의 내일은 꿈을 이룬 이의 전형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전 05화 #5 좋은 책을 추천할 수 있을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