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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딜리버 리 Mar 23. 2024

여행, 몸으로 기억된다

대안학교를 비롯한 각종 여행업자들이 이런저런 있어 보이는 명칭과 지역만 (대부분 아시아권이긴 했지만) 다를 뿐인 청소년 대상 여행상품을 인문학을 빙자한 올바른(?) 교육적 가르침을 내세우며 판매했다.


자식에게 세상 견물을 넗혀주려는 일정 이상의 경제력을 가진 보호자들의 욕망과 게임을 맘대로 못하는 불편은 있지만 공부에서 벗어날 호조건이라 여행지엔 관심 없는 청소년의 몸이 결합되어 그런대로 돈벌이가 되었다.


낯선 곳으로 가고, 먹고, 자고 보는 게 여행의 본질인데, 여행지까지 가는 방법, 자는 숙소, 먹는 식당은 당연히 모르고, 알 필요가 없었다. 수백만 원을 넘는 올바른 교육적 가르침에 그 노력과 수고가 포함되어 있었다.


스스로 하는 게 없는 여행이라니!


나 역시 비슷한 여행상품을 팔았고, 여행인문학을 빙자한 썰을 풀수록 쪽팔림은 조금씩 쌓여갔다. 그 반발심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행의 본질에 가까운, 최소한 흉내라도 낸 상품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참가자가 먹고, 자고, 보는 걸 직접 만들어야 하는 국내여행 1박 2일과 방학 기간 해외 장기 체류 상품이 만들어졌다. 국내여행은 참가자가 목적지까지 알아서 와야 하고(1번 이상 갈아타기), 숙소와 식당을 사전 예약하고, 현지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혹시라도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이 안 된 건 아니지만 의외로 그들은 잘 찾아왔다. 1시간 단위로 자신의 이동경로와 현재 자신의 사진을 단톡방에 공유하며 혹시나 하는 걱정의 크기를 줄였다. 걱정은 끝도 없이 커지는 놈이라 걱정한다고 줄어들지 않는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맞는데!


참가자가 직접 여행을 짠다고 했지만 설마 하며 긴가민가하더니 1차 모임장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들을 멀뚱히 보고 있는 어른(?)을 보더니 어라~ 이거 진짜네 이러며 자신들이 맡은 분야를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부산, 통영, 정선, 밀양, 대전, 경주, 서울을 돌아다녔다. 처음 한두 번은 엉성하고 조잡하던 숙소, 식당, 현지 여행 프로그램도 차츰 내실이 생겼고,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국내여행으로 여행자의 기본 자질을 나름 연마하고 #씨엠립으로 떠났다. 도착한 첫날, 앞으로의 여행일정을 나누는 자리에서 해외라 적응기가 필요하다 싶어 오늘과 내일까지만 숙소예약했다. 모레부터는 숙소, 식당, 여행 프로그램을 너네가 직접 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어른이 해주는 건 없다, 숙박(1인 1박 10달러), 식사(1끼 1인 5달러), 입장료와 이동수단(1일 1인 10달러) 등을 고려해서 1일 1인당 35달러, 예산안에서 사용하고 매일 정산한다, 위험요소 외에 간섭은 없다고 했다.


-아니, 영어가 안되는데 숙소를 어떻게 예약해요?

-아니, 중고딩이니 기본 영어는 알잖아. 정 못하겠으면 밖에서 주무시던가

-허어~ 이건 아니죠

-허어! 여러분한테 캄보디아 씨엠립 가니까 사전에 현지 정보 조사하라 했고, 이렇게 진행된다고 얘기했잖아

-말만 그런 줄 알았죠

-에이~ 사람을 뭘로 보고!

-아니, 해외 나왔는데 어른이 책임져야죠

-아니, 여러분의 안전은 책임지죠. 그리고 어른들한테 그렇게 속았으면서 또 당하고 싶어?(세월호 참사 때 제주도 도보여행을 같이 했었다)

-하아~ 이거…

-여러분이 믿고 싶어 하는 보호자에게도 이렇게 운영한다 충분히 설명드렸고, 동의받았어

-진짜로 우리가 알아서 해요?

-진짜로! 난 여러분이 미성년자라 어쩔 수 없이 옆에 있을 뿐


처음엔 인터넷으로만 숙소를 찾더니 금액 맞는 데가 별로 없다며 예산을 올려달라기에, 1인 1박에 10달러면 2인에 20달러로 머물 숙소는 충분히 많다, 직접 찾아가서 흥정을 하는 것도 방법이다, 마침 성수기라 이틀 이상 방을 구할 수 없어서 둘째 날부터 숙소 잡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게 중요한 일과였다.


며칠 지나자 어디보다 어디가 더 싼 것도 찾아내고, 가격 흥정을 하기 시작했고, 어떤 날은 초저가 도미토리에서 자고, 이삼일 모은 돈으로 약간 고급진(2인 1실에 전용 욕조, 조식 제공) 호텔에서 자는 호사를 부리기도 했다. 처음 식당 갈 때는 한 명이 시키면 우르르 따라 주문하더니 자신들이 먹고 싶은 걸 각자 주문하기 시작했다. 식당 직원이 마음에 든다고 단골이 된 쌀국숫집을 지날 때며 오며 가며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머문 도시를 떠나기 전날, 그들은 단골식당을 찾아가 마지막 만찬을 먹고, 정들었던 직원과 사진도 찍고 작별인사를 나눴다.


-한 달 머물렀는데 뭐가 기억에 남아?

-릴리요(단골 식당 이름)

-식당 이름이 왜 기억에 남아?

-키쿤(직원 이름)이 있으니까요

-또?

-새벽부터 엄청 부지런해요

-새벽?

-맨날 같은 시간대 말고 다른 시간대에 밖에 나가보라고 해서, 새벽에 숙소 앞을 몇 번 나갔거든요

-엄청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일을 해요

-비 오는 날 회랑에 몇 시간 앉았던 거요

-그게 왜?

-그냥 멍하니 앉아 내리는 비를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그 느낌이 좋았어요


다들 맨발에 쪼리 아니면 샌들을 신고 돌아다녔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피부색은 점점 짙어졌다. 중간 경유지인 중국 어느 공항에서 누가 더 선명한 지 여행의 색깔을 견줬다.


이런저런 미사여구에 각종 수식어를 갖다 붙이지만 여행은 몸의 움직임이다. 여행의 기억은 몸이지 머리가 아니다. 머리는 빠르게 기억할뿐 쉽게 잊고, 몸의 기억은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이제 20대 중후반의 청년이 된 중고딩들은 그때의 몸의 기억을 잊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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