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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희 May 09. 2021

믿는 만큼 자랍니다

아이도, 그리고 어른도요.

  오랫동안 영어 교과 전담을 맡다 다시 담임교사가 된 지 올해로 2년째. 지난 학교 마지막 해에 이어 이번 학교에서도 운 좋게 같은 학년을 맡아 조금은 수월하게 공부를 가르치고 있다. 거의 10년 만에 다시 담임을 맡은 작년에는 새로 발령을 받은 신규 교사의 마음으로 일하려고 애썼다. 혹시나 내가 실수해서 다른 동학년 선생님께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년 한 해 돌다리 두드리듯 하루하루 전전긍긍하며 보내고 나니 올해는 그보다는 조금 여유가 생겼다.

  지난 금요일에 강낭콩 화분 두 개를 옮기다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업 시작하자마자 일어난 일이어서 엄청 당황스러웠다. 내 자리에 있던 의자와 바닥이 순식간에 흙과 모종으로 뒤덮였다.

  '아... 이걸 어쩐다.'

  내가 넋을 놓고 고민하는 사이 아이들이 우르르 나오더니 해결책을 찾았다.

  "이건 쓰레받기로 쓸어 담아야겠는걸? 서은아, 도와줄 거면 빗자루와 쓰레받기 가져와."

  교사인 내가 아이들에게 한 말이 아니고 한 학생이 다른 친구에게 한 말이었다. 평소 맨 뒷자리에서 수업에 소극적으로 참여하던 지훈이까지 앞에 나와 여기저기 흩어진 흙을 치우는 데 팔을 걷어붙였다. 화분 두 개에서 떨어진 꽤 많은 양의 흙이 그렇게 몇 사람의 노력으로 눈 깜빡할 사이에 치워졌다. 아니, 오히려 흙을 쏟기 전보다 자리가 더 깨끗해졌다. 학생들이 책상 안쪽의 먼지까지 싹싹 청소를 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가끔 한 번씩 이렇게 흘려주시면 안 돼요? 재밌어요."

  실수해도 괜찮다고 해주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여자 아이들이 천사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에 다시 담임을 맡게 되면서 한 선생님의 블로그를 팔로우하기 시작했다. 바로 '멍멍샘의 교실'이다. 여기에는 한 선생님이 오랫동안 담임교사를 하시며 쌓은 경험과 귀중한 자료들을 꾸준히 올려주신다. 나 같은 신참 담임선생님이 참고할 만한 글이 많다. 블로그가 운영된 지 오래되어 좋은 게 보이면 그와 관련된 이전 자료를 찾아보기에도 좋았다. 나는 아이들을 위해 연구회 활동을 하지도, 특별한 연수를 찾아 듣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런 다른 선생님들이 올려주는 자료를 읽어본 후 취사선택해 적용하곤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때때로 생각보다 훨씬 큰 효과를 발휘했다.

  멍멍샘의 블로그에 담긴 큰 지향점은 '민주적인 교실'이었다. 그 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우리 반도 그 점을 본떠 교사가 모든 규칙을 제시하고 지키도록 강요하기보다는 매주 학급 회의를 통해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학교 생활을 함께 해 나가도록 했다. 스물세 명의 학생들은 제각기 학교 생활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얘기하고 싶은 부분을 아이들도 다 알고 있었고 내가 꺼내기 전에 먼저 이야기가 되었다. 아이들끼리 의논을 하다 보면 내가 생각한 방향으로, 혹은 그보다 더 근사한 해결책이 정해졌다. 그런 다음 그다음 주 학급회의에서 반성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한 내용을 지키고자 하는 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내가 언성을 높이거나 무섭게 굴지 않아도 아이들이 알아서 더 나은 우리 반을 만들고자 애썼다. 일례로 줌 수업 때 마지막까지 계속 얼굴을 비추지 않는 학생이 있었는데 반 친구들이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자 결국 그 아이도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을 때는 끝까지 잘 되지 않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이제 우리 반 줌 수업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는 학생이 없다.




  화분을 떨어트린 그 날, 학생들의 반에서의 역할을 3월 이후 처음 바꾸었다. 급식 당번, 칠판 당번, 교실 청소 당번 등 각 역할마다 학생들의 지원을 받아 분배를 해주었다. 코로나로 인해 점심 식사 전에 반 아이들 체온을 재주는 역할이 있는데 거기에는 무려 3명이나 지원을 했다. 세 명의 지원 서류를 익명으로 읽어주고 가정 적합한 사람을 다 같이 뽑았다.

  점심시간, 새 체온계 담당 학생이 반전체의 체온을 재어주고, 급식 당번들이 급식차를 교실로 들여왔다. 처음 급식 당번이 된 태영이의 만면에 미소가 그득했다.

  '저렇게 좋을까...'

  급식을 나누어 줄 생각에 상기된 표정을 바라보며 인간은 소속된 집단에서 작은 역할이라도 하며 성취감을 느끼는 게 맞구나 싶었다. 어떻게 하다가 나는 이렇게 예쁜 아이들을 만났을까?

  새로 교실 깔끄미로 배정받은 아이들이 내가 혼자 했을 때보다 훨씬 깨끗하게 교실 청소를 하고 나간 교실, 나는 교감선생님께 고민하던 메시지를 드렸다.

  '법원에서 조정 기일이 잡혔는데 혹시 그 날 연가를 써도 괜찮을까요?'

  사실 아이들이 등교를 하는 날 오전 시간이라 반쯤 마음을 비운 상태였다.

  '그러세요.'

  크게 기대하지 않고 혹시나 해서 여쭤보았는데 이렇게 쉽게 오케이라니. 갑자기 내가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나 싶었다. 남편 복도 없고   동안  딸도  보고 있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그래, 모든   나쁘란 법은 없구나. 나로 인해 우리 반은 조금  행복할까. 학교에 내가 도움이 되고 있을까. ,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었다. 나도 쓰임이 있는 사람이어서. 내가   있는 일이 뭐라도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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