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서로에게 일으켜왔던 헤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구병모의 '헤살'을 읽다가 산골소년의 사랑이야기로 그리고 J에게로


구병모의 ‘헤살’은 황순원의 ‘소나기’ 뒷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헤살’은 물 따위를 젓거나 하여 흩뜨림 또는 그런 짓을 말한다.

분홍 스웨터, 남색 치마 입은 채 그대로 묻어달라는 소녀의 유언.

약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소녀는 죽음을 맞았고 소녀를 주려고 근동에서 제일 무섭다는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를 서리해 놓은 소년은 전해 주지 못한 호두알만 만지작 거린다.

소녀를 여전히 잊지 못하는 소년은 개울가 징검다리 소녀가 앉아있던 그 돌 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쭈그리고 물을 움켜쥐던 소녀의 환영이, 또 어디선가 흰 조약돌을 집어던지며 “이 바보” 하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징검다리를 건너지 못하는 소년은 여러 날 학교에 가지 못한다. 징검다리를 건너는 다른 아이들의 쑥덕거림과 상관없이 늘 그곳에 붙잡혀 있는 소년. 그의 주머니엔 말라비틀어진 대추 몇 알과. 흰 조약돌. 가루가 될 정도로 만지작 거린 호두 알맹이가 들어있다.


소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앓이를 하는 소년은 신열을 견디며 힘겨운 시간을 보낸다. 흙물 뭍은 저고리는 소년의 몸에 더 이상 맞지 않아 시접을 내어야 한다고 소년의 어머니는 말한다.

선생님 얼굴만이라도 보고 오라는 엄마의 성화에 마지못해 집을 나서는 소년. 소년의 책보에는 공책과 연필 대신 흙물 묻은 저고리가 들어있다.

소년은 개울에 이르러 징검돌을 건넌다. 하나, 둘, 셋... 늘 소녀가 앉아있던 그 징검돌 위에 서서 주머니 안의 호두알과 대추, 흰 조약돌을 차례대로 개울로 던진다. 마지막으로 책보를 열어 흙물이 지지 않은 저고리를 개울에 빠트린다. 저고리는 개울물을 머금고 마치 그곳을 떠나지 않으려는 것처럼 아래로 가라앉는다. 소년은 저고리가 그 자리에 가라앉지 못하도록 손으로 헤살을 일으킨다. 그제야 저고리는 손을 흔들 듯 팔랑거리며 떠내려간다. 소녀에 대한 소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이별의식이다.

소년은 비로소 조금은 가벼워진 채로 징검돌을 건너고 개울을 건넌다.


구병모의 헤살을 읽는 내내 예민(YEMIN)의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라는 노래가 귓가에 맴돌았다

<YEMIN (예민) /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

풀잎 새 따다가 엮었어요

예쁜 꽃송이도 넣었고요

그대 노을빛에 머리 곱게 물들면

예쁜 꽃모자 씌워 주고파

냇가에 고무신 벗어놓고

흐르는 냇물에 발 담그고

언제쯤 그 애가 징검다리를 건널까

하며 가슴은 두근거렸죠

흐르는 냇물 위에

노을이 분홍빛 물들이고

어느새 구름 사이로

저녁달이 빛나고 있네

노을빛 냇물 위에

예쁜 꽃모자 떠 가는데

어느 작은 산골 소년의 슬픈 사랑 얘기

풀잎 새 따다가 엮었더니

예쁜 꽃송이도 넣었고요

그대 노을빛에 머리 곱게 물들면

예쁜 꽃모자 씌워 주고파

냇가에 고무신 벗어놓고

흐르는 냇물에 발 담그고

언제쯤 그 애가 징검다리를 건널까

하며 가슴은 두근거렸죠

흐르는 냇물 위에

노을이 분홍빛 물들이고

어느새 구름 사이로

저녁달이 빛나고 있네

노을빛 냇물 위에

예쁜 꽃모자 떠 가는데

어느 작은 산골 소년의 슬픈 사랑 얘기

노을빛 냇물 위에

예쁜 꽃모자 떠 가는데

어느 작은 산골 소년의 슬픈 사랑 얘기


흐르는 냇물에 발 담그고 / 언제쯤 그 애가 징검다리를 건널까 / 하며 가슴은 두근거렸죠..

그 노래를 유난히 잘 부르던 J가 있었다. 모든 노래를 잘 부르던 J는 유독 이 노래를 좋아했다. 소년과 소녀처럼 풋풋했던 우리의 시간들. 그 오래전 기억들.

어떤 만남이든 오랜 시간이 지나면 잊히게 마련이지만 어느 순간 그 기억들은 몸 어딘가에 잠복해있다가 어떤 단어 하나, 어떤 리듬 하나에 시간을 거슬러 수면 위로 떠오른다.

각자의 길을 걸어온 우리. 우리에게 ‘헤살’은 무엇이었을까?

J도 나도 성장의 징검다리를 건너온 것이다. 징검다리 건너 쉼 없이 저마다의 개울을 건너왔으리라. 각자의 삶에서 ‘헤살’을 일으키며....

우리 지난 시간들 그 언저리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일으켜왔던 ‘헤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누구에게나 지난날의 사랑 한 조각들은 헤살처럼 남아있을 것이다.

J도 기억할까? 아주 가끔... 어느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를 즐겨 부르던 J도.

이제는 녹슨 기억들. 빛 바랜 이야기들. 여전히 기억 한 자리에 남아 헤살 거리는 것들이 떠오른다.

모처럼 ‘예민’의 노래 ‘ 산골 소년의 사랑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날이다. /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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