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타인을 관찰한다
불안이 높을수록 자기만의 주관적 공식이 너무 뚜렷한 것 같다. 그들은 불안하기 때문에 자신만의 공식으로 타인을, 환경을, 세상을 통제하려고 할 때가 있으니까. 누군가와 상호작용을 하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자신의 공식을 벗어나는 말을 하면, 그걸 용납하지 못한다.
오늘 오랫동안 알고 지낸 동료를 만났다. 오랜만이었다. 그라고 해서 무조건 남성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단지 모두 ‘그’라고 통일해서 부르는 게 편하다. 어쨌든 그는 여전히 자신의 직장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다. 벌써 5년 넘게.
처음에는 그가 가엽다고 생각했다. 그를 괴롭힌 직장 동료가 너무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물론 일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분명 그가 계속 원했던 직장이었는데, 그는 그 직장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적응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비슷한 문제로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직장 동료들이 자신을 안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직장 동료들의 업무 처리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직장의 환경과 시스템에 문제가 많다고 말했다.
그가 유일하게 만족하는 건 급여뿐이었다. 그래서 다닌다고.
다만 이번에는 말이 바뀌었는데. 급여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정말 다른 일을 찾고 싶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반가운 마음에 그의 말을 지지했다. 그렇게 오늘은 대화의 분위기가 좋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내 자리 쪽에 쓰레기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대신 치워주더라고. 그래서 고맙다 생각했지. 대신해 주니까.”
“근데 그거 사실 심리학에서는 그 사람의 통제 욕구라고 보기도 해.”
“뭐...?”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눈썹이 갈매기 모양이 됐고, 눈동자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공기의 변화에 내 몸도 흠칫했다. 그만큼 살벌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지금 어떤 모습인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
사실 이를 통제 욕구로 해석할 수 있는 건 이상한 게 아니었다. 통제 욕구가 높을수록 사람과 상황, 환경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려고 하니까. 그는 앞에 쓰레기가 약간 있는 상태가 불편하지 않았고, 이를 불편하게 느낀 타인이 와서 그 쓰레기를 치운 것이었으니까. 이 설명이 이어지고 나서야 그의 분노가 가라앉는 듯 보였다. 눈썹이 제자리를 찾았고, 주름이 사라졌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성이 난 듯 변했던 그의 태도는 이상했다. 그리고 뒤이어 다시 시작된 그의 직장 동료들에 대한 얘기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부장님들이 다 나 안 좋아해. 내가 도와줄까요 하니까 얼굴들이 안 좋더라고.”
떠올려 보면 그는 자발적으로 타인을 돕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의 그러한 행동은 다른 환경의 직장에서는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그의 직장은 직원들 간의 업무가 독립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업무에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타인의 솔선수범이 반갑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평가한 것처럼 불안이 높았고, 자기만의 규칙이 있었다. 그건 마치 공식과도 같았다.
‘타인을 돕는 건 선행이다.’
그러니 그는 부장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듯 보였다. 자신이 돕겠다는 건 분명 선행이니까. 그리고 남을 도운 듯 보였던 쓰레기를 치운 사람의 행동. 그걸 내가 통제 욕구라고 평가했으니 몹시 불쾌할 수밖에. 그는 ‘통제 욕구’를 부정적 이미지로 인식하고 있으니까.
아마도 자신의 행동이 비난받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이미 자신도 회사에서 타인들에게 거부당했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는 봄날의 햇살처럼 따듯하고 다정했던 그의 과거.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직장에 취업한 후 점차 달라지는 그의 현재 모습들.
우리가 함께 걷던 길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가슴에 슬픔이 살포시 내려앉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