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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보낸다

나는 세상을 관찰한다

by 잇슈


어느 기관에서 전문가 연수를 듣던 날이었다. 어떤 교수님이 문득 이렇게 말했다.


“심리학을 모르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쌍합니까. 자기 마음의 고통의 이유에 대해 알 수가 없으니. 그러니까 우리는 얼마나 축복받은 존재입니까. 이렇게 나에 대해 알아가고 또 성장해 가고.”


그 말에 부분적으로 동의하지만, 심리학을 모른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불쌍하다’ 평가하는 건 약간 교만해 보인다고 느꼈다. 우리가 타인에 대해 함부로 불쌍하다고 말하는 건 꽤 무례하지 않을까. 그 사람의 삶과 나의 삶의 우열을 가리는 듯한 느낌의 표현이니까.


마치 본능적으로 서열을 정리해서 우위에 서려고 하는 것처럼. 인간이란 끊임없이 우월성을 추구하는 듯 보일 때가 있다. 가장 기본적으로 물건에 명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값어치를 달리하거나. 아이들의 교육 현장에서도 학군에 순위가 매겨져 있다.


순위 경쟁과 수치의 차이가 인간의 고통을 가중시킨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왜 이걸 멈추지 못하는 것일까.

날씨가 따듯했던 오후. 카페에서 막 나와 집에 가던 중이었다. 그 동네는 소위 말하면 학군이 높은 지역의 자녀들이 많이 사는 동네였다. 나는 잠시 강의를 위해 그 동네에 방문했던 것이었을 뿐이다.

내 옆으로 엄마와 함께 길을 가는 초등학생이 보였다. 아이는 내 가슴께도 오지 않을 정도로 작았지만, 아이의 가방은 아이의 몸 절반 가까이 될 정도로 크고 무거워 보였다. 아이의 손에는 무언가 주머니도 들려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엄마는 가방을 절대 들어주거나 도와주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계속 그렇게 뭐 빠뜨리고 그럴 거야? 네가 그래서 서울대를 갈 수 있겠어?”


아이는 아무 대답하지 않았고, 눈동자는 공허한 듯 보였다. 다만 멍하니 자신의 앞, 그 아래쪽에 시선을 둔 채 걷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가 짊어진 책가방이 마치 아이의 슬픔과 우울을 가득 담은 눈물주머니처럼 상상됐다. 채 터지지 못한 채 끌어안은 눈물들이 방울방울. 그 안에 담겨있을 것 같았다.


최근 청소년들의 심리적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이해가 되는 장면이었다.

그 아이도 Wee클래스에 가려나. 자기 스스로 갈 수 있는 힘이 아이에게 남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성도 이름도 모르는 그 아이. 낯선 성인이 그에게 용기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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