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누나가 둘인 집에서 막내로 태어난 최강우는 4대 독자 집안의 보물이었다.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소박하게 사는 분들이었다. 넉넉지 않은 형편 때문에 누나들은 일찌감치 대학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기업 생산직 직원으로 취업한 큰 누나는 스무 살부터 강우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했고, 둘째 누나는 강우의 대학 생활비를 모았다.
1980년을 전후로 태어난 누나 둘이 집안의 유일한 아들을 위해 대학 공부를 포기하고 심지어 한창 자신을 꾸미는 데 여념이 없을 이십 대에 월급을 쪼개 남동생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는 이야기는 흔하지 않다. 보통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연륜 깊은 사람은 1993년에 인기 몰이를 한 드라마 작품인 ‘아들과 딸’을 떠올리며 남아선호 사상이 깊게 뿌리내린 집에서 태어난 이란성쌍둥이의 운명처럼 똑똑한 누나 둘이 희생해 그저 그런 남동생을 뒷바라지하는 집안 분위기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이야기는 ‘아들과 딸’ 속 ‘귀남이’, ‘후남이’와는 조금 다른 결로 흘러간다.
두 명의 누나는 어릴 때부터 강우를 무척 귀여워했다. 강우는 누나들 사이에 껴서 놀기를 좋아했다. 인형 놀이는 기본이고 공기놀이와 고무줄놀이를 섭렵하며 자랐다. 키가 크고 운동 신경이 좋았던 강우는 남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축구나 농구도 잘했기 때문에 ‘여자처럼 논다’라는 오해 같은 건 받지 않았다. 누나들은 강우가 남자 친구와 잘 어울리면서도 세상의 절반인 여자들과 잘 지낼 수 있는 노하우를 비의도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한편, 강우의 누나들은 공부에 특기도 취미도 없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일찍 취업해서 돈을 벌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어차피 자식 셋의 대학 뒷바라지까지는 어려운 형편인데 굳이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않는 자신들이 대학을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귀여운 막내 동생이 공부를 잘한다면 누나 둘이서 동생 대학교 등록금과 생활 자금 정도는 지원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강우는 두 누나를 통해 남자와 다른 여자들의 특성을 자연스럽게 체득했고, 여자들에게 잘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찍 깨달았다.
‘여자들은 감정이 섬세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여자 말을 잘 듣는 게 세상을 평화롭게 살아내는 지혜이다.’
누나들 덕분에 강우는 대학생 때부터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잘생긴 동기들보다 더 인기가 많은 강우를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선배도 있었다.
“네 인기의 비결이 뭐냐? 좀 알려주라. 나도 인기 좀 있고 싶다.”
이렇게 물어보는 동기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강우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누나들 사이에서 보고 배운 것이 몸에 배어 일부러 인기를 끌려고 노력한 적이 없는데도 그렇게 되었다. 이제와 동기에게 누나를 만들라고 할 수도 없고. 누군가가 너 무슨 향수 써?라고 물었는데 응? 그냥 내 살 냄새인데?라고 말할 수밖에 상황과 비슷했다. 강우는 머리만 긁적일 뿐이었다.
재은과 강우의 결혼 생활은 순항하는 배와 같았다. 잔잔한 물결을 따라 구름 한 점 없는 태평양을 항해하는 모습이었다.
“오빠, 다들 왜 그렇게 싸우면서 사는지 모르겠어. 오늘 은수랑 미지 만났는데 나는 이해가 안 돼. 왜 자고 있는 남편의 뺨을 때리고 싶은 마음이 생길까?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어.”
결혼 10년 차인데도 부부싸움 한 번 한 적 없는 재은은 남들의 결혼 생활도 자신처럼 평온한 줄 알았던 것 같다. 이들 부부는 정말로 평온할까? 현미경을 들이대 하재은, 최강우 부부를 살펴보자.
“오빠, 건조기 속에 빨래 좀 꺼내서 개 줘.”
“응. 알았어.”
“오빠, 변기에 물 때 꼈잖아. 이런 건 보는 사람이 곧바로 청소 하자.”
“응. 그러자.”
“윽. 오빠. 냉장고에 양파가 썩어 문드러졌어. 윽.. 더러워.”
“내가 처리할게. 그냥 놔둬.”
“오빠, 곧장 신을 신발이 아니면 신발장에 넣자.”
“응. 그럴게.”
“오빠..................!”
“오빠..................!”
재은의 잔소리는 끝이 없고 강우는 묵묵히 ‘응 알겠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재은이 강우의 생각과 반대인 주장을 펼쳐도 강우는 ‘음.. 그럴 수도 있겠네.’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였다. 강우는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가자고 이끌거나 보고 싶지 않은 영화를 보자고 하거나 사고 싶지 않은 물건을 사자고 해도 그것이 서로의 ‘생명이나 재산에 큰 위협을 줄 수도 있는 일’이 아니라면 재은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랐다. 재은과 강우의 평온한 결혼 생활은 강우가 누나들에게서 배운 지혜 덕분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다.
“뭐든 아내가 하자는 대로 하는 걸 보니 최강우는 특별한 취향이나 주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최강우의 MBTI 유형은 ESTP다. 외향적이고 감각적이며 주관이 뚜렷하고 즉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반면 하재은은 INFJ이다. 내향적이고 직관적이며 주변의 눈치를 보고 계획적인 성격이다. MBTI 유형으로 사람을 단순하게 재단할 수는 없지만 강우도, 재은도 MBTI 검사 결과가 자신의 신념과 일치한다고 느꼈다. 강우는 본래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다. 무려 T 항목이 95%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최강우는 주관이 없는 게 아니라 가정의 평화를 위해 하재은의 의견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강우의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재은의 잔소리는 해가 갈수록 깊어졌다. 부부는 닮는다. 어린아이가 상대의 좋은 습관보다 나쁜 습관을 먼저 인지하고 배우듯 부부도 마찬가지일 때가 있다.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재은의 잔소리를 십 년 가까이 들은 강우는 점점 예민한 사람이 되었다.
“재은아, 수건이랑 옷을 왜 섞어서 빨래했어?”
“재은아, 방충망에 먼지 낀 거 봐.”
“재은아, 현관이 깨끗해야 복이 들어와. 현관에 택배 쌓아놓지 마.”
“재은아.........!”
“재은아.........!”
“오빠! 왜 이렇게 잔소리를 많이 해? 말 안 해도 나도 안단 말이야. 내 눈에도 보이니까 잔소리 좀 그만해.”
순간 싸늘해진 거실의 공기. 먹구름이 거실을 덮쳤다. 강우와 재은은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잠시 시공간이 사라진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난 시간을 되감으며 재생해 보는 두 사람. 재은은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강우는 제 머리를 긁적였다.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거실에 온풍이 풀었다.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비췄다.
“재은아 내가...”
“오빠 내가....”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다. 강우는 재은에게 먼저, 재은은 강우에게 먼저 말하라며 양보했다.
“아니야. 네가 먼저 얘기해.”
강우는 언제나 재은이 먼저 이야기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재은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은 다음 재은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대답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오빠, 내가 잔소리를 참 많이 하지? 오빠가 요즘 부쩍 안 하던 잔소리를 해서 점점 짜증이 났는데, 여태 내가 오빠한테 그렇게 했다는 걸 방금 깨달았지 뭐야. 친구들 말이 맞았어. 다투지 않는 부부는 둘 중 한 명이 참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우리 집에서는 참는 사람이 오빠였나 봐. 지금껏 그걸 몰랐다니. 나도 참 둔하다 둔해.”
“아니야. 나도 내가 점점 예민해지고 있는 걸 느꼈는데, 느꼈을 때 너한테 얘길 하든 멈췄어야 했는데 나도 모르게 너도 좀 당해 보라는 심술 맞은 생각을 했나 봐. 미안해.”
재은이 다가와 강우 품에 안겼다. 강우도 재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강우는 얼마 전에 읽은 책 속 문장을 떠올렸다.
- 우리는 우리의 배우자가 가진 결점들에 감사해야 한다. 만일 애초부터 그런 결점들이 없었다면,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나은 누군가와 결혼할 수 있었을 테니까! (출처: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아잔 브라흐마 지음) -
재은은 잔소리가 많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신보다 더 나은 누군가와 결혼했을 것이다. 잔소리가 많은 사람이기에 자신과 결혼한 것이다. 4대 독자에 누나가 둘 인 남자를 신랑감으로 달가워할 여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게다가 결혼 십 년 만에 자신의 단점을 알아채는 배우자도 흔치 않다. 평생 함께 살아도 자신의 결점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을. 앞으로도 누나들의 가르침을 받잡아 재은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고 재은의 의견에 잘 따르는 남편이 되리라. 한쪽이 지면 가정이 평화롭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열 번 백 번 지리라.아내가 자신의 뺨을 때리고 싶을만큼 분노가 차오르게 하지 않으리라.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강우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