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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 수프 한 그릇의 무게 (1)

호텔 복도를 거닐 때부터, 머릿속은 버섯수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by Youhan Kim Feb 01. 2025

호텔 복도를 거닐 때부터, 이미 머릿속은 버섯수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스파를 마치고 돌아온 뒤, 밤 9시쯤이 되면 룸서비스를 부탁해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전부터 여행이나 출장 때 고급 호텔에 묵으면, 밤늦게 종종 버섯수프를 시켜 먹는 습관이 있었다. 따뜻하게 끓여 낸 크리미한 수프 속에 은은하게 퍼지는 버섯 향. 그 묘한 풍미와 버섯 특유의 고소한 곰팡이 냄새가 늘 나를 안심시켜 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수프가, 그저 편안함을 주는 음식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되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주의] 아래 이야기는 극단적 선택 및 자해 시도를 다룹니다. 읽는 분들 중 불편함이나 트라우마를 느낄 수 있는 분들은 충분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위기 상황에 있거나 자살을 고려 중이라면, 반드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스파에서 나와 방으로 돌아오니, 시계는 8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페이셜 스파와 어깨 마사지를 받은 덕분인지 얼굴과 몸이 한결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어쩌면 이게 내 몸에 주는 마지막 선물일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 어딘가가 또 한 번 씁쓸해졌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나는 끝까지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존엄을 지키고 싶었으니까. 미리 준비해둔 정장 바지, 셔츠, 벨트, 타이, 그리고 자켓을 하나하나 꺼내 침대 위에 펼쳐두었다. 주름 없이 반듯이 다려져 있는 옷가지를 확인할 때마다, 어딘가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옷을 갖춰 입기 전, 먼저 룸서비스에 전화를 걸었다. “버섯수프 하나 부탁드릴게요. 네… 네, 가능합니다. 가능하면 좀 따뜻하게 부탁드려요.” 혹시라도 “재료가 떨어졌습니다”라거나, “지금은 룸서비스가 불가능합니다” 같은 변수가 생기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전화 건너편에서 “잠시 후에 준비해 드리겠습니다”라는 친절한 답이 돌아왔다. 정확히 말하면, ‘한 치의 오차가 생기면 내 모든 계획을 접겠다’고까지 생각했었는데, 그런 오차는 없었다. 모든 것이 희한할 만큼 완벽하게 맞물리는 중이었다.


옷매무새를 마무리한 후, 호텔 방 안 조명을 살짝 낮췄다. 창밖으로는 네온사인이 수없이 번쩍이는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클래식 음악도 틀어볼까.” 구독 중인 애플뮤직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클래식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했다. 익숙지 않은 곡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지만, 차분하고 고요한 현악 연주가 방 안 공기를 잔잔하게 채웠다. 마치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은은히 퍼지는 선율이 죽음 앞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으려 애쓰는 내 마음을 살짝 감싸주는 것만 같았다.


9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룸서비스 초인종이 울렸다. “실례합니다.” 직원이 밀고 들어온 트레이 위에는, 은색 뚜껑 안에 든 버섯수프가 놓여 있었다. 호텔 주방에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뚜껑이 달린 카트를 사용했지만, 아무래도 내가 준비를 마치느라 시간을 조금 끌었기에 수프가 완벽히 뜨겁진 않았으리라. 직원은 “편안한 밤 되세요”라며 공손하게 인사한 뒤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그가 말한대로, 아주 고요한 편한 밤이 될 것이었다.



나는 트레이를 침대 밑, 다리를 펼 수 있는 편한 위치에 놔두었다. 수프가 담긴 그릇을 확인하니, 스팀이 살짝 올라오기엔 이미 늦어 보였다. 그래도 일단 은색 뚜껑을 열자마자 버섯 향이 후욱 끼쳐 왔다. “이렇게라도 먹을 수 있으니 다행이네.” 내가 주문했던 ‘마지막 식사’가 무탈하게 도착했음을 확인하고, 순간 숨을 고르며 웃었다. 속으로 ‘조금씩이라도 따뜻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지만, 따뜻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미 충분히 많은 일이 뜻대로 진행되고 있으니까.


조심스럽게 약 봉투를 꺼내, 그중 가장 강력한 진통제 캡슐 열 알을 먼저 집어 들었다. 왜 열 알부터였을까. 뭔가 상징적으로 ‘열’을 채워야겠다는 것도 있었고, 일단 수프 위에 녹여둘 약의 분량으로 가장 적절해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캡슐은 쉽게 분리가 되도록 되어 있었고, 나는 하나씩 천천히 돌려가며 분리해 가루를 수프 정중앙에 털어 넣었다. 하얀색 가루가 수프 위에 작은 언덕처럼 쌓여 가는 광경이 이상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 한 숟가락, 한 덩어리에 사람이 둘이나 숨질 수 있을 만큼의 위력이 담긴 거라니.”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목덜미가 살짝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약이 예상보다 수프에 잘 녹아들지 않아서, 숟가락으로 슬슬 젓기 시작했다. 꺼진 TV 밑 블루투스 스피커는 여전히 잔잔한 현악을 뿜어내고 있었고, 방 안의 공기는 점차 정숙해졌다. 머릿속에서는 ‘3, 2, 1… '모든게 완벽해야만 하는 로켓 발사 장면을 떠올리게하는 담담한 목소리가 반복되고 있었다. 사실 그 순간까지도 떨림이나 감정의 폭발은 없었다. 나 자신이 굉장히 논리적이고 계산적인 상태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마치 업무 매뉴얼을 하나씩 체크해 나가는 듯한 기분이랄까.


이제 가루를 충분히 섞었으니, 나머지 알약들—근육 이완제와 신경안정제 등 60알 가까이 준비해 둔 약—도 차례대로 손에 쥐었다. 그들은 아주 작은 알약들이었고, 종전에도 모든 약은 한번에, 한입에, 한모금의 물과 함께 털어 먹어야 한다는 고집 그대로 모든 60정이나 되는 약을 한 번에 집어 삼켰다. 아마, 한동안 정신과 약을 복용해 왔기에, ‘알약을 삼키는 행위’ 자체에 워낙 거부감이 거의 없었기 때문일지도. 그 알약들이 20~30분 후면 내 호흡을 완전히 멈추게 할 거라는 사실만이 비일상적이었을 뿐이다.



(다음 회차에서 계속)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위해]

 • 자살 예방 핫라인(한국) 1393 / 정신건강 상담 전화 1577-0199

 • 베트남, 호주 등 해외 거주자의 경우, 지역별 자살예방 또는 정신건강 지원 센터를 확인

 • 주변에 믿을 만한 친구, 가족, 전문가에게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길 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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