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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섯 수프 한 그릇의 무게 (2)

9시 30분을 살짝 넘긴 시점, 가루가 섞인 수프를 한 숟가락 떠먹었다.

by Youhan Kim Feb 01. 2025

딱 9시 30분을 살짝 넘긴 시점, 가루가 섞인 수프를 한 숟가락 떠먹었다. 


식어 버린 버섯수프는 예상대로 꽤 쓰디썼다. 혀끝에서 쓴맛이 빠르게 번져 나갔고, 무의식 중에 ‘아, 이 정도 쓴맛이라면 약 때문이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버섯 특유의 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서인지, 온전히 ‘약물’을 먹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몸이 순간 '찌릿' 하는 작은 반응을 보이긴 했다. 


[주의] 아래 이야기는 극단적 선택 및 자해 시도를 다룹니다. 읽는 분들 중 불편함이나 트라우마를 느낄 수 있는 분들은 충분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위기 상황에 있거나 자살을 고려 중이라면, 반드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어릴 적 약을 가루 내 삼키던 기억이 떠오르네.’ 당시에도 이렇게 쓰디쓴 가루를 입 안에 털어 넣고, 물로 넘기면 온 입안에 달라붙던 그 약 냄새가 싫어서 울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울만큼의 감정조차 없었다. 이미 며칠 전부터 유서를 쓰며, 온갖 감정을 털어냈으니까. 숟가락을 조금 더 굴려가며, 수프를 연달아 세 숟가락 가량 더 떠먹었다. 눈물이 나진 않았지만, 목구멍을 지나는 알약들의 쓴맛 때문에 코끝이 찡한 느낌이 잠깐 스쳤다.


5분 정도가 흐르는 동안, 수프 그릇은 순식간에 거의 비워졌다. “한 번에 들이켜자”라는 생각으로 빠르게 마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온전한 식사라기보단, ‘약을 맛으로 덮어버리는 과정’에 가까웠달까. “이제 끝이구나.” 쓴맛이 혀에 남아 있었지만, 마음은 의외로 평온했다. 설령 이게 나를 ‘진짜로’ 끝장내지 못하더라도, 나는 이미 충분히 준비해 왔으니 괜찮을 거라는 무모한 확신도 있었다.


수프를 다 마시고 나서, 아무런 기척도 없이 트레이 위에 그릇을 그대로 두었다. “직원이 나중에 치우겠지.” 살아 있는 상태였다면 조금 더 깔끔히 정돈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젠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미지근한 물 한 잔을 따로 마시면서 입 안의 쓴맛을 조금 씻어 냈다. 그리고는 기품 있어 보이려 노력한 정장 차림 그대로 침대가 아닌, 창문 곁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어두운 조명 아래서 비치는 유리창 너머로, 도시가 웅웅거리는 듯한 저주파 소리를 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의자에 걸터앉은 채로 약 10분 정도는 서울의 밤을 바라봤다. 창문은 열리지 않는 초고층 호텔이다 보니, 그저 밖을 내다볼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불빛이 도로를 따라 움직이고, 빌딩 옥상의 붉은 경고등이 주기적으로 깜빡였다. “저 안에 얼마나 많은 인생이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살짝 측은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모두 치열하게 살아가겠지만, 내 기준에서는 이제 ‘남 일’일 뿐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던 중, 몸이 서서히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머리가 둥둥 떠오르는 듯했고, 반쯤 감긴 눈꺼풀이 점차 무거워졌다. 근육이완제와 신경안정제가 작용하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원래도 이런 류의 약을 종종 복용해왔기에 낯설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그 용량이 남달랐다. ‘드디어 오나 보네.’ 점점 두려움이 밀려올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담담했다. 오히려 “아, 계획대로 되고 있구나”라는 안심이 더 컸다. 그리고 그때, 정말 예상치 못한 순간에 아주 오래전에 잊었다고 믿었던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 만났던, CRPS라는 희귀 질환을 앓던 친구. 나보다 더 고통스럽게 살았던 아이였다. 서로 희귀병 환자라는 걸 알고도 크게 친해지진 않았지만, 그 아이가 매일 불에 타는 듯한 고통과 싸우면서도 학교에 꾸준히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묘한 애틋함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아, 걔는 지금도 살아 있으려나?’ 단 1초 정도, 그 아이의 희미한 이미지만 스쳐갔다. 그런데 그 1초가 묘하게 나를 흔들었다. 그리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휴대전화를 열어, 무슨 무의식적 충동에 이끌리듯 카톡 창을 찾았다. 끊긴 지 8년이 넘은 그 친구의 아이디가 여전히 남아 있었고, 나는 거기에 단 한 줄, “잘 지내?”라는 말을 남겼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행동이지만, 그 순간엔 정말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채팅창을 닫자마자, 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약 기운이 점점 세졌고, 의식이 몽롱해졌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슬슬 누워야겠다.’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려는데, 다리가 살짝 휘청거렸다. 그래도 넘어지진 않았다. 침대까지 한두 발 내딛는 사이에도 머릿속이 자꾸 빈 공간을 맴도는 기분이 들었다. ‘아, 시간이 얼마 안 남았구나.’ 약간은 그 사실이 반가웠다. 혹여나 내가 계획한 대로 죽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이 있었는데, 몸이 주는 신호로 인해 그 불안이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침대 위에는 여전히 실키한 시트가 고르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 위에 정장을 그대로 입은 채로 누웠다. 잡다한 생각이 밀려들기도 했지만, 몸이 둔해지니 의식적으로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다. ‘아까 먹은 수프, 쓴맛… 나중에 호텔 직원이 보면 깜짝 놀라겠지?’ 하는 엉뚱한 상상도 스쳤다. 눈꺼풀이 감기는 동시에, 어쩌면 영원히 다시 뜨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놀랍도록 마음은 고요했다. 그전까지 유서를 쓰며 속에서 끓어올랐던 감정들은 이미 다 쏟아낸 뒤였다. 무감각에 가까운 평온함 속에서, 어느새 내 의식이 느슨하게 가라앉았다.


그 찰나, 친구에게 남긴 카톡이 스쳤다. “잘 지내?”라는 짧은 메시지. 대답이 올 리 없다고 여겼지만, 혹시라도 확인이 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이미 내게 그걸 고민할 힘은 없었다. 정신은 빠른 속도로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숨 쉬는 게 점점 무거워졌다. 방 한켠에는 비워진 버섯수프 그릇이, 트레이 위에서 고요히 식어가고 있었다. 내가 감상을 품을 새도 없이, 호텔 방은 적막한 어둠에 잠기는 듯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완벽히 이완되는 가운데, 내가 바라던 대로 호흡이 멈추며 평온한 마무리를 맞을 거라고 믿었다. “쓴맛이 나는데… 이건 약 때문이겠지?” 그 마지막 숟가락이 떠오르면서, 내 존재는 마치 스위치를 내린 듯 모든 감각이 끊어져 가는 기분이었다. 조명 아래에서 반짝이던 정장의 단추나, 클래식 선율, 그리고 버섯 향이 뒤섞인 쓰디쓴 맛까지 모두 한순간에 사라질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순간, 정말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리라고 확신했다. 호텔 방 안에는 적막만이 흐르고, 밖에서는 서울의 빛과 소음이 여전히 아득한 울림으로만 느껴졌다. 아까까지는 내가 그 풍경을 지켜봤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과 무감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와중에, ‘버섯수프 한 그릇’의 무게가 이토록 클 줄은, 차마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죽음이 삶의 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다만 자신의 숨결 속에서 그 끝을 짐작할 뿐이다.” 사상, 조르주 바타유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위해]

 • 자살 예방 핫라인(한국) 1393 / 정신건강 상담 전화 1577-0199

 • 베트남, 호주 등 해외 거주자의 경우, 지역별 자살예방 또는 정신건강 지원 센터를 확인

 • 주변에 믿을 만한 친구, 가족, 전문가에게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길 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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