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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형 Feb 01. 2021

봄비

소리없이 스며드는


새벽에 목이 말라 일어났습니다

물을 반 컵  마시고 화장실을 다녀왔습니다

볼과 눈가가 좀 팽팽한 느낌이 듭니다

거울을 보니 역시 약간 부었습니다

눈주름때문에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핸드폰을 들고 10여분씩 의자에 앉았다 다를 반복하며 떠오르는 문장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소파에 기대어 문구를 다듬었습니다

편집을 마무리했을 때 볼을 만져보니 쉽게도 야위어져 있더군요 

글을 쓴다는 것은 몸에 빚지는 일인가 봅니다


침대에 잠시 누웠다가 다시 거실로 나왔습니다

어둠 가운데 작은 led등들이 여기저기 깜빡입니다

밤도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했겠군요

안쓰러운 마음이 듭니다

왠지 슬쩍 거실 유리문을 열어보고 싶습니다

새벽 밖의 공기는 아주 신선할 것 같거든요

문을 열어보니 아기 비가 소리 없이 내립니다

아, 그러고 보니 입춘이 다가왔습니다

남녁의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는데

여기서는 아직 향기를 맡을 수 없습니다


단단한 겨울을 밀어내는 흰 매화도 홍매화도 반갑지만 어머니의 황매화가 사무칩니다

두 살 터울 형과 다투는 소리가 들리면

부엌에서 밥을 짓던 어머니는 뒤꼍에서 회초리를 꺾어 오셨습니다

바로 황매화 가지였습니다

그때에는 샛노란 꽃 색깔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지요

그 이후로는 황매화를 본 적이 드물었습니다

이젠 황매화 가지감기순간이 황홀하게 그리워집니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황매화와는 다른 죽단화 또는 겹황매화라 불리는 식물이었습니다)


이맘때 내리는 비는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을 닮았습니다

하늘이 조금이라도 엄한 표정을 지으면

곧바로 하얀 싸락눈으로 변할 것만 같습니다

공연히 베란다 밖으로 길게 팔을 내밀어봅니다

오는 듯 마는 듯 가볍게 비 부스러기가 팔등을 스쳐갑니다


어제 산책길엔 지난 가을이 뽑혀나간 빈 꽃밭엘 들어갔습니다

문득 정해진 보행로로만 걷기가 싫어졌습니다

흙은 폭폭 들어가며 발자국이 남았니다

늦겨울과 초봄에만 느낄 수 있는 촉감이지요

겨우내 얼어서 가만히 부풀었던 땅이

얼음결정이 사라지고 나면 부푼 그대로 남아 숨을 쉽니다


어느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아, 어머니의 보드라운 젖가슴 같은 흙이여...


문구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드러움과 대지 어머니는 분명합니다

아스라한 기억은 새로운 시구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 시각 내리는 비는 그 땅을 조용히 내려 앉히겠지요?

그리고 동면하던 씨앗과 개구리에게 솟아날 힘을 부여할 것입니다


참, 어린 싹이 두터운 검은 흙을 밀고 나오는 광경을 본 적이 있나요?

없다면 아직 세상을 다 못 본 것입니다

그 어리고 연한 것이 거대한 땅거죽을 이겨내는 모습은 경이롭습니다

한없이 들여다보며 감탄하다 보면 우리도 한 때 싹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살아감의 첫날 첫 마음이 기억나지요

그제사 지금은 굽은 길 위에 서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망각은 편리하지만 늘 정의롭지는 않습니다


문득 방에 주전자와 물 컵을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가 쓰시던 스텐주전자 말입니다

작은 쟁반에 올려져 있었지요

그러면 굳이 목이 말라 어둠 속을 서성거릴 일이 없겠지요

소년일 적엔 왜 어른들이 자다 말고 물을 마시는지 몰랐습니다


건조해진 육신과 마음은 누군가의 물 한 잔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슬비 사이로 슬쩍 이른 봄이 건너오는 아침입니다


오늘도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안녕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덧 날이 밝아옵니다


* '굽은 길'이란 표현은 류완님의 글에서 차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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