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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대학을 졸업하다

by 장수생

나 스스로 공부에 적성이 없다는 걸 중학생 때부터 깨달았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영어를 배워도 한문을 배워도, 다음날만 되면 도대체가 무엇을 배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낳아주신 부모님 덕분인지 공부를 하지 않아도 항상 중간은 했었다. 40명 중 20등 정도를 항상 유지하면서 중고등학교 6년을 다녔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그래도 대학은 가고 싶어서 이전 11년의 학창 시절과는 다르게 공부에 조금은 시간을 투자했었다. 그런 결과로 2000년도에 지방의 국립대학교 농과대학에 겨우겨우 최초 합격이 아닌 추가 합격자로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에 지원할 때 전공과를 선택한 기준은 없다. 최종 목표가 등록금이 저렴한 지역 내 국립대 입학이었기에 점수에 맞춰서 선택한 전공이었다. 그랬기에 기대도 희망도 열정도 없는 신입생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뜨거웠던 때는 언제였나요?라고 물으면 대학시절 그중에서 신입생 때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공부, 여행, 운동, 연애, 음주 등 하고 싶은걸 다 해보려고 노력했고 해 보았던 시절이기에. 하지만 나는 아니다. 지금까지도 뜨겁다고 말할 정도의 시절을 보내 본 적이 없다. 신입생 때도 고향에서 같이 올라온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친구도 별로 사귀지 않았으며, 공부도 열심히 해본 적이 없고, 여행도 가본 적이 없고, 그렇다고 운동을 열심히 해본 적도 없는 무색무취의 학창 시절을 보냈었다. ‘공부를 안 할 거였으면 미친 듯이 놀아보기라도 했었어야 했는데’라는 후회를 지금도 종종 하곤 한다. 남들처럼 대학생이니 동아리도 가입해보고자 동아리 모집기간에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낯선 사람과의 관계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용기나 자신이 없었다. 그랬기에 모든 동아리 모임에 2회 이상 참석한 적이 없다.


신입생 시절 때의 기억이라곤 중고등학교 친구들과 어울리며 학교 앞 먹자골목에서 술 한잔하거나, pc방에서 게임을 하든지 아니면 허름한 건물 지하에 있는 만화방에서 3천 원에 5시간씩 죽치고 앉아서 보내는 하루하루였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도저히 이렇게 시간을 소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그 날은 스스로의 위안을 위해서 도서관을 가기도 했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협지와 판타지 소설만 주야장천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늦은 시간에 도서관에서 나올 때는 하루 종일 도서관에 있었구나라는 나름 뿌듯한 감정에 취해 자취방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이런 지루해 보이고(그 당시에는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다) 단순한 생활을 하며 보냈으니, 당연하게도 성적 또한 좋을 수가 없었다. 첫 학기 때는 학사경고를 받았었다. 그 당시에는 성적표를 집에 보내주던 시절이기에, 그 귀한 여름방학을 시골집에서 성적표가 올 때까지 얌전히 쳐 박혀, 매일 아침 우체부 아저씨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그렇게 여름방학을 보낸 지 며칠 후 성적표를 먼저 받게 된 날 내용물을 확인하지도 않고 바로 찢어서 버렸다. 우리 부모님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 글을 보고 알게 되면, 혼내시려나? 궁금하다.

기억에도 남지 않는 대학생활을 하던 중 군 휴학을 하고 입대를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전역 직전에는 앞으로의 삶에 대하여 많은 고민을 했다.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복학을 하고 나니 마냥 좋기만 했던 신입생 때의 느낌과는 사뭇 달랐다. 특히, 주위 선배나 동기들의 미래에 대한 한 마디 한 마디가 크게 와 닿기 시작했다. 지역거점 국립대이긴 해도 수도권 대학들과 비교하면 학벌로만 경쟁하기엔 어려움이 많은 시기였다. 그래서 그런지 주위의 많은 학생들이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도 공무원 시험 준비를 당연히 하였으며, 학과 공부도 해보려고 노력했었다. 그래서 3학년 이후 성적은 나쁘지 않았고, 성적 장학금도 받게 도었다. 하지만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으니 이 이상 뭘 더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방황하는 그 순간조차도 시간은 너무 빠르게만 흘러갔다.


모든 친구들이 대학을 가길래 나도 대학에 왔다. 많은 친구들이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길래 나도 공무원이 돼 보고자 공무원 고시 학원에도 다녀보았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던 국어와 한국사. 초면 이어던 행정법과 행정학. 10년 넘게 바라보았지만 결국 썸도 타보지 못하고 끝난 영어. 내 길이 아닌 걸 처음 시작할 때 느끼고 있었었지만, 밖으로 드러낼 수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하고 싶은 게 없었다는 거고, 또 다른 하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기에 곧 끊어질게 확실한 끈이지만 붙잡고 있어야만 했다. 불안하지만 드러내지 말아야 했다. 부모님과 지금은 아내가 된 여자 친구의 기대 또한 저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고시생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던 2007년 새해 갈 곳이 없는 나에게 대학은 이제 나가야 된다며 졸업장을 주었다. 나의 찬란하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험한 세상에 숨어있을 수 있는 마지막 도피처였던 대학생 신분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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