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이 미야케 로디세이 퓨어
외유내강의 모습.
로디세이가 아련하게 앉아있는 여자라면
로디세이 퓨어는 천천히 걸어가는 여자
제일 처음 향수란 걸 알게 된 건 친구를 통해서였죠. 그녀는 우리가 아직 대학생이던 시절, 항공운항과를 졸업하고 K항공 스튜어디스로 취직을 했어요. 가끔 놀러가는 그녀의 방에서, 그녀가 세계를 누비며 하나씩 건져 올린 신문물을 접하곤 했어요. 용돈으로 사는 대딩과 다르게 번 돈을 자유롭게 쓰던 그녀에게서 나는 부티의 향기~. 그 진원지는 화장대에 놓여있던 투명하고 긴 원뿔 모양의 화장품이었습니다.
-이게 모야?
-이세이 미야케 향수.
-로..디세이? 이세이의 물..이란 건가?
(재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배운 나의 잘난척..)
이세이의 물은 너무너무너무 좋은 향을 풍겼고, 우린, 다음 비행때 그 물을 꼭 사다 달라며 돈을 쥐어 줬죠. 그때 처음 향수를 알게 된 전, 그 이후로 로디세이를 두어번 더 쓰고 이것저것 다른 향수로 갈아타면서 향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세이 미야케 퓨어를 보고 있자니 그때의 풋풋했던 시절이 떠오르네요. (향수가 그래서 향수인가요)
이세이미야케는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고 이 퓨어를 디자인했다네요. 로디세이에선 실버캡 위에 동그란 물방울이 있었는데 퓨어에서는 병의 아래쪽을 동그랗게 만들어서 병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물방울 모양이 됐어요.
탑노트 : 마리티마, 엠버 그리스
미들 노트 : 은방울꽃, 다마시나 로즈, 삼박 자스민
베이스 노트 : 캐시메란
로디세이향은 프레쉬 아쿠아틱 플로럴 계열로 전체적으로 순수하면서도 맑은 꽃향기가 났었죠. 퓨어는 우디 아쿠아틱 플로럴 향으로 맑은 꽃향기는 비슷한데 여기서 우디향기가 더 나면서 살짜쿵 중성적 향으로 기울었어요. 로디세이가 맑은 물에 떠있는 꽃이라면 퓨어는 바닷물에 떠있는 꽃이랄까. 베이스노트로 캐시메란 때문인 듯합니다.
머스키하고 우디한 향기가 바람처럼 코끝을 지나는 느낌. 이 머스크한 향은 남자향수처럼 나는 게 아니고 딱 여자의 살냄새정도로 납니다. 생각해보면 여성의 존재성이 10-20년 전에 비해 변화했어요. 과거보다 더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성향이 짙어졌죠. 이세이 미야케 향수도 그 느낌을 정확히 따라잡은 듯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로디세이 향수를 좋아했던 분이라면 로디세이 퓨어 향수도 좋아하실 거예요.
이세이 미야케 로디세이가 소녀시대 윤아와 어울린다면 로디세이 퓨어는 김태리를 연상시킵니다. 외모는 여리여리 맑고 투명하지만 고요한 눈동자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듯한 느낌. 외유내강의 모습이라고 할까요. 로디세이가 아련하게 앉아있는 여자라면 퓨어는 천천히 걸어가는 여자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