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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석현 May 25. 2022

배움은 같아도 깨달음은 다를 수 있다.

똑같이 새벽이슬을 먹어도 벌은 꿀은 뱀은 독을 만든다.

사랑하는 아들 딸아.


배움은 같아도 깨달음은 다를 수 있다.

똑같이 새벽이슬을 먹어도 벌은 꿀은 뱀은 독을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동일한 배움을 얻더라도 보다 나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평소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말과 같이 평소에 준비된 자가 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자명(自明)한 사실이자 세상의 이치(理致)가 아니겠느냐. 그러니 평소 배움을 게을리 하지말고 늘 스스로를 갈고 닦도록 하여라.


아비가 아는 한 분이 이런 질문을 하더구나. 강의 의뢰를 받았는데 그것이 특정 종교였고, 우리나라에서 약간은 이단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종교라 망설여진다는 것이었다. 하여 나는 망설이지 말고 기꺼이 강의를 하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똑같은 이슬을 먹고도 벌은 꿀을 만들고 뱀은 독을 만드는 법이다. 새벽이슬은 밤사이 하늘에서 살포시 내려앉아 생겼을 뿐인데, 벌은 새벽이슬이 나에게 꿀을 주었다고 하고 뱀은 새벽이슬이 나에게 독을 주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같은 가르침을 주어도 그것을 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그 누가 이것을 이슬의 잘못이라 하겠느냐. 이슬은 그저 내 몸을 맡긴 것 뿐 벌과 뱀이 받아들이는 차이일 뿐이다.


작가나 강사를 비롯해 지혜와 지식을 가르치는 선생들은 단지 새벽이슬을 만드는 역할을 해줄 뿐이다. 그것을 먹은 이후 꿀로 만들거나 독으로 만드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다. 선생의 역할은 투명한 새벽이슬을 만드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다. 선생이 국가를 가리고 종교를 가리고 인종을 가리면 되겠느냐. 종교집단에서 가르치는 지식(지혜)과 전쟁터에서 가르치는 지식과 학교에서 가르치는 지식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선생은 그저 진리를 추구할 뿐이고 그것을 전파할 뿐이다. 그것을 배우고 익히고 가공하여 본인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오로지 청중의 몫이다. 청중이 달라졌다고 하 가르치고자 하는 지식(지혜)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이는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내 마음'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상대의 마음'이다. 관계가 어색해질까 봐 쉽게 말을 하지 못하는 것뿐이지 내 마음을 상대에게 던져주면 그 이후 그것을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은 상대의 몫일 뿐이다. 일을 하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해야 하는 업무는 빨리 마무리하고 상대에게 던져주는 것이 좋다. 그 이후부터는 일을 넘겨받은 상대의 시간이 흐르는 것이다. 굳이 흐르는 시간에 대한 책임과 부담을 내가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홀가분해지고 싶다면 '마음'이든 '일'이든 상대에게 넘겨주어라. 그 이후로는 상대의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이 흐르게 되는 것이다.


너희가 세상을 살아가며 때로는 배우기도 할 것이고, 때로는 가르치기도 할 것이다. 살면서 만나는 많은 '배움'과 '가르침'을 잘 활용하여 새벽이슬을 통해 꿀을 얻는 벌이 되도록 하면 좋겠구나. 가르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할 것이고, 배운 다음에는 또 가르쳐야 할 것이니 '가르침'과 '배움'은 그런 면에서 다르다고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또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 딸아.


배움은 같아도 깨달음은 다를 수 있다.

똑같이 새벽이슬을 먹어도 벌은 꿀 뱀은 독을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부디 이슬로 꿀을 만드는 벌이 되어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도록 하여라. 많은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 나이가 들어서도 나이들지 않도록 살아가면 좋겠구나.


사랑한다 나의 아들 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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