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을 함께한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나서 지금껏 인연을 이어오고 있으니 그 인연의 길이가 반세기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서로 공감하고 공유하는 부분이 많아 오래 끓인 진한 곰탕 같은 사이다.
오랫동안 사업하면서 열심히 살아 온 친구는 딱히 아픈데 없이 건강했었다. 그랬던 친구가 5~6년 전에 느닷없이 직장암 판정을 받았다. 본인도 많이 놀랐겠지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내 마음도 철렁했었다.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그 상황에서도 친구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때문인지 수술은 잘 되었고, 그 이후에도 건강관리를 잘한 덕분에 이제 완치 판정을 코앞에 두고 있다. 참으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치료하는 동안, 친구는 꼭 하고 싶었던 걸 실행에 옮겼다. 친구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집을 지어 살고 싶어 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여기저기 많은 곳을 돌아본 모양이었다. 그중에서 제일 마음에 들었던 곳이 홍천군 내면 명개리였다.
3년 전, 명개리에 집을 짓고 주말이면 부부가 그곳에 내려가 지낸다. 집이 완공되었을 때, 가보고 그 뒤로는 어쩌다 보니 가볼 기회가 없었다. 친구가 자리 잡은 곳은 계곡 따라 시골길이 이어지는데 “명지거리”에 있다.
강원도를 이야기할 때. 첩첩산중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 말처럼 친구의 집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렇긴 해도 갑갑하거나 위압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 반대로 산에 포근하게 안겨 있어 아늑하게 느껴진다.
명지거리는 맑고 깨끗한 계곡을 따라 포장된 길이 나 있다. 계곡물이 얼마나 맑고 깨끗한지 손만 담가도 찌들은 삶의 찌꺼기들이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 계곡과 어깨를 나란히 한 길옆에는 순박하게 보이는 산들이 먼 길을 가는 길동무처럼 친근하게 다가온다.
마을의 통로이자 걷기 좋은 시골길은 6~7km 정도 이어지고, 길옆에는 적당한 간격을 두고 집들이 뚝뚝 떨어져 있다. 그렇게 보이는 경치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말할 수 없이 편안해진다. 힐링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르는 그런 경치다.
명지거리는 구룡령로를 가다가 명개리 경로당 건물이 있는 쪽으로 좌회전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길 초입에 건물들이 모여 있어 그 뒤로는 길이 없을 것 같은데, 그곳을 지나면 숨어 있던 시골길이 이어진다.
친구 집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명지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에 있다. 먼저 와있던 고등학교 친구들과 어우러졌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시간 동안의 안부를 묻고 나서 곧바로 점심 준비를 했다. 참나무 장작불에 고기를 굽고, 한쪽 화덕에다가는 민물고기 매운탕을 끓였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친구들이 있고, 고기는 먹음직스럽게 익어간다. 이 모든 걸 말없이 넉넉하게 품어주는 산들이 있어 정말 근사한 점심이었다. 도시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이런 멋진 식사는 이곳에 사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자 특권이다.
반주까지 곁들여 기분 좋게 점심을 먹고 나서 명지거리 구경에 나섰다. 집을 나서 시골길에 들어서자마자 맑은 계곡 물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저를 빼놓고는 이 길을 걸을 수 없다는 듯이 바짝 곁으로 다가왔다. 며칠 전에 내린 비 때문인지 물소리는 한층 더 크고 맑았다. 그 물소리가 도시 생활에 지친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처음에 왔을 때는 친구 집에만 있다가 왔기 때문에 이곳의 멋과 경치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천천히 걸으면서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는 경치를 보고 있으면 친구가 왜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또 생각을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긴 친구의 결단과 용기가 부러웠다.
엄마 손을 꼭 잡고 가는 아이처럼 계곡은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다, 계곡의 폭이 아주 크지는 않지만, 계곡의 경치와 정취를 보여주기엔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오히려 이 정도의 보기 좋은 크기여서 넉넉한 산과 풍요로운들 그리고 소박한 시골길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계곡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로운 장면을 보여준다.
느릿느릿 돌아가는 고장 난 영화 필름처럼 새로운 경치가 이어져 한눈을 팔지 못한다. 그렇다 보니까 욕심 때문의 어디에 먼저 눈길을 보내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산을 보고 있으면 들과 집의 경치가 눈길을 유혹하고, 그것을 보고 있으면 또 계곡이 눈에 밟혔다.
계곡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모습부터 주변의 바위와 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 낸 멋진 경치까지 번갈아 나타났다. 무더운 여름에 아이들이 물놀이하기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에게 그 얘길 했더니, 한여름에도 오랫동안 물놀이를 하지 못한다고 한다.
계곡물이 차가운데다, 우거진 나무 때문에 햇볕이 들지 않아 물놀이하고 나면 금방 한기를 느낀다고 한다. 푹푹 찌는 여름날에 한기를 느낀다니 이만한 피서지가 있을까 싶다. 평평한 곳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흘러가는 물소리만 듣고 있어도 끈적끈적한 무더위쯤은 쉽게 떨쳐낼 수 있을 것 같다.
오래전에 호주 출장을 갔을 때, 한적한 시골 마을에 머무른 적이 있다. 그때 아침 산책을 하면서 자연 속에 뚝뚝 떨어져 있는 그림 같은 집들과 한적한 경치를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이곳은 호주에서 보았던 그 마을에 버금가는 멋스러움과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집 앞의 너른 밭에는 집주인의 노력과 정성으로 가꾼 농작물들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고추를 키운 농부는 수확 철을 맞아 고추 따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른 집 밭에는 먹음직스러운 무가 허연 속살을 수줍게 드러냈다. 오랜만에 보는 돌배나무에는 아이 주먹만 한 작은 배들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얼마나 많이 달렸는지 축 늘어진 가지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았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하나를 따서 먹어보니까 제법 맛이 들었다. 그 맛에서 이제 가을도 멀지 않았다는 게 느껴졌다. 어쩜 명지거리에는 이미 가을이 와 있는지도 모른다. 이곳은 아침저녁으로 긴 옷을 입어야 할 정도로 서늘하다고 한다. 오늘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잘 거니까 가을이 어디쯤 숨어 있는지 찾아봐야겠다.
세상인심이 각박하다고 해도 시골 인심은 그래도 남아있다. 고추 따느라 바쁘게 손을 놀리던 동네 주민이 친구를 알아보고는 한사코 집으로 가자고 했다. 손사래를 쳤지만, 마냥 거절하는 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동네 분을 따라갔다.
집 마당에는 이제 막 수확한 탐스러운 고추들이 가득했다. 손님이 왔다고 캔 음료를 가져오는데. 한사람에게 세 개씩이나 꺼내 놓는다. 자연스럽게 시골살이 이야기가 나왔고, 주민분이 하는 이야기에 따라 같이 화를 냈다가 웃기도 하다 보니까 동네 주민이라도 된 것처럼 편하고 정겨웠다.
친구 집에 다시 돌아오니까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다리가 제법 묵직했지만, 그만큼 기분이 더없이 좋았다. 그동안 도시 생활하면서 알게 모르게 몸과 마음에 달라붙어 있던 삶의 파편과 찌꺼기들을 말끔하게 씻어냈다. 정말 근래에 경험해보지 못한 힐링의 시간을 제대로 즐겼다.
친구 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곳은 2층 테라스다. 전망이 툭 터진 그곳에 안락의자를 놓아두었다.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있으면 유리창 너머로 마을 길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로 들어오는 휘어진 길을 바라보는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초록의 나무들이 가득한 사이로 이어지는 길을 보고 있으면 누군가 반가운 사람이 찾아올 것 같은 기다림과 알 수 없는 그리움이 교차했다.
아주 가끔 마을 분들의 차가 지나갔다. 길 위를 달리는 차의 모습이 마치 소설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안락의자에 앉아 멍하니 그 길을 바라보았다. 간밤에 입고 잤던 반바지와 반소매 옷으로는 아침의 서늘한 냉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덮고 잤던 얇은 이불을 가져와 칭칭 두르고 나서 다시 또 느긋하게 그 길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보니까 그 길을 따라 주위를 살피며 슬금슬금 넘어오는 가을의 전초병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