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대학교 시절 수학 문제들을 한 번 생각해 보자. 고등 수학 주관식 문제들은 하나의 공식만 가지고 풀 수 있는 직관적인 문제들이 거의 없고 여러 개념을 이용해 복합적으로 여러 번 계산해야 답을 구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문제풀이 도중 초반에 계산실수가 나오면 그 이후에 푸는 문제풀이 방법이 정확했더라도 줄줄이 오답을 적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의 일이 다른 일들과 얽히고설켜 있거나 혹은 하나의 일이 그다음 일의 초안이 되고 또 그다음 일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식의 연쇄적인 프로젝트들이 있기도 하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대학병원 연구실에서의 일도 그렇다. 첫 번째 실험에서 얻은 결과물을 이용해 그다음 실험을 이어가고 이 과정을 반복하며 하나의 최종 결과물을 확인할 때까지 몇 주가 걸리기도 한다. 그 말은 즉슨 실험 초반에 실수를 했는데 캐치를 하지 못한다면 최종 결과물이 나오지 않거나 특정 결과물이 나온다 한들 그 결과물이 정말 원하던 것인지 믿을 수 없게 된다. 최근 내가 이런 실수를, 그것도 두 번이나, 저질렀다. 혼을 나는 것이 마땅했지만 내 실수에 대한 상사분 둘의 태도가 극명하게 차이가 났고 그로 인해 나 또한 실수를 대하는 태도를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내 직속상사인 분은 평소에도 조금... 강박증에 다혈질이다. 실수에 대해 관대하지 않다는 뜻이다. 상사분이 내 실수를 캐치했을 때 이미 그날의 실험을 마치고 나는 퇴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분은 특이하게 메시지를 글로 적지 않고 음성사서함처럼 쓴다. 하고 싶은 말을 녹음을 해서 메시지로 보내는데 이럴 경우 상대방의 어조가 들리기 때문에 상대방이 어떤 기분인지 잘 들리게 된다. 그날 역시 내 상사분은 화를 꾹꾹 참아내는 게 보였고 음성메시지의 시작이 "내가 최대한 너한테 소리 안 지르고 얘기해 볼게"였기에 나는 그날 저녁 내내 맘이 편할 수 없었다. 이 날 사죄의 메시지를 보내고 이후로 나는 일자리에서 항상 긴장하며 또 실수하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며 일한다. 하지만 몸이 경직되어있다 보면 사실 실수가 더 나오게 된다. 반복되는 작업이 많기에 옛날보다 실수가 줄긴 했지만 일하면서 몸과 마음이 편치 않다 보니 실수가 없어지진 않는 것 같다.
내 직속상사분이 한 달 동안 컨퍼런스로 자리를 비웠을 적에 다른 상사분과 일을 하는 동안에도 실수가 한 번 있었다. 이 때는 일주일을 열심히 달려오고 내놓았던 결과물이 예상과 많이 달랐고 그 이유를 돌아가서 추적해 보니 내가 처음에 시약을 잘못 섞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분은 입은 거칠긴 하시지만 평소엔 긍정마인드로 지내시는 분이었기에 화를 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실수는 일주일을 날려먹은 실수였기에 크게 혼날 각오를 하고 내가 실험 보조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실망시켜 드리는 것 같다며 죄책감을 보였었다. 그런데 그분이 내게 보여준 반응은 아주 뜻밖이었다.
y축: 자신감, x축: 시간
나를 화이트보드 앞에 데려다 놓더니 이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하셨다. 그리고는 찬찬히 설명해 주셨다.
"자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자신감이 0이겠지. 그러다가 조금씩 배우면서 자신감이 올라가. 그러다 실수를 한번 해. 아주 거하게 한 번 말아먹는 거야, 지금 니가 한 것처럼. 그럼 자신감이 다시 뚝 떨어져. 대신 이제 알았지, 이 부분에서 좀 더 신경 써야 된다는 걸, 그리고 앞으로 이런 실수를 하기도 전에 니가 캐치를 할 거야. 그러면서 또 자신감이 올라가. 그러다가 이번엔 다른 실수를 해, 그리고 자신감이 떨어지고 다시 깨닫고 다시 자신감이 올라가고를 반복하는 거야. 그러다 보면 언젠간 자신감이 실수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시기가 오게 돼. 나도 네 자리에서부터 올라온 입장이니까 믿어도 돼."
이걸 듣고 난 후 머리가 잠깐 띵했었다. 화를 내기는커녕 격려를 해주셨고 너무 주눅 들어있으면 거기에 또 너무 꽂혀 실수가 잦아질 수 있으니 이번 실수를 계기로 또 배웠다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먹으라는 말은 생각보다 큰 힘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말 이분과 일을 하는 한 달 동안에는 아주 편하게 일했고 저 실수 이래로 한 번도 실수가 나온 적이 없다. 비록 최종 결과물은 원하던 결과물은 아니었지만 예상밖의 결과는 아니었고 다른 접근방법을 통해 다시 시도해 볼 수 있는 실험이었다.
사람은 살아가며 누구나 크고 작은 실수들을 한다. 일상생활에서, 인간관계 사이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의 하루하루들을 돌아보면 우리들은 모두 실수 투성이다. 하지만 실수는 곧 배움의 기반이 된다. 성공으로부터 얻는 배움도 물론 소중하지만 실패, 실수를 통해 얻는 깨달음이 더욱 와닿고 남들에게 공감을 사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키가 되기도 한다. 나도 후자의 상사분처럼 내 실수에도 너무 자책하기보단 잘못된 점을 잘 짚고 넘어가되 배움의 발판과 성장의 기반으로 삼고 이 마인셋을 주변 사람들, 후배들이나 훗날 제자들에게 전파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마치 지금 내가 의대를 재도전하는 것이 첫 번째 시도의 실수를 인지하고 만회하려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