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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곰 Apr 04. 2024

졸업 6년 차, 피라미드 게임에 들어서다.

피해자이자 방관자일 수밖에 없는 우리.

 최근 오랜만에 끝까지 다 본 드라마가 있었다. 피라미드 게임. 반 내에서 등급을 매기며 불법적인 규칙을 만들어놓고 괴롭힘을 합법화하는 설정의 드라마. 오늘 문득 그 드라마가 생각났다.


 광고물 하나를 제작하는 데에 우리는 총 4 곳의 컨펌을 받아야 했다. 카피는 마케팅팀 팀장님께, 디자인은 광고 본부의 실장님께,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브랜드의 총괄자와 상무님께. 온라인팀과 기획전 매출 대안을 짜기 위해 나는 마케팅의 ‘ㅁ’부터 질의응답을 해야 했다. 이 기획전 매출에 붙은, 실무에 지식이 없는 프로젝트 팀 덕에. 물론 이 프로젝트는 마케팅팀의 장과 온라인팀의 장과, 상무의 컨펌이 필요했다. 오늘 하루의 절반은 그런 것이었다. 보고를 하고 컨펌을 받고 수정을 하고 피드백을 받고 문의를 받고 회신을 하고. 문득 이 구조가 ‘피라미드 게임’에서 본 그것과 매우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피라미드 게임은 제목에 나와있는 ‘피라미드’ 대로, 이 판을 만든 단 한 명의 권력자를 기점으로 순차적으로 명 수가 많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이 피라미드를 만들기 위해 짐을 짊어지는 소수 위에 다수가 군림할 뿐이다. 꼭짓점을 기점으로 단단하게 뭉쳐있는, 그러나 꼭짓점 하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피라미드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역피라미드인 이 관계성과 우리 브랜드의 상황이 매우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한 사람을 기점으로 매우 단단하게 뭉쳐진 ~장들. 실상은 그 장들의 지휘에 움직이는 소수의 손들.


 마치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젠가 같기도 하다. 빠진 블록들 사이로 썰렁한 공기가 흐르고, 엉성하게 설키어 위태로운 아래와 빈틈없이 채워져 압박을 가하는 위의 블록들. 쓰러질 듯하면서도 한 플레이어의 고집과 반칙으로 버티어오고 있는 젠가. 이제는 좀 쓰러뜨리고 다음 게임으로 시작했으면 하는 다른 플레이어들의 끓어오르는 마음.


 그저 드라마라고 생각했고 그저 학교라고 생각했던 그 일들을 현실의 내가, 스물여섯의 내가 겪고 있다. 드디어 졸업했다고 생각했던 학창 시절의 미묘한 긴장감을 다시금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똑같이 유치하면서도 점잖은 척하는 모습으로.


 권력이라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권력은 모래주머니라 그것을 가진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눈앞의 것만 좇는 걸까.

 

 나는 때때로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상상력을 총동원한다. 그에게 있을 아주 가슴 아픈 사연을 머릿속으로 써 내려가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단 한 명 있다.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경험의 영역이기에 공감을 할 수가 없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이상한 정의감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성수지처럼 대단한 정의감에 불타는 것은 아니다. 어디 하나 멍에 들어서 증거로 들이밀 수도 없고, 이 미팅들을 녹음한다고 해도 보통의 회의 보통의 회사일뿐이다. 사회의 피라미드 게임에서 우린 피해자인 동시에 방관자인 여럿이다. 이 게임을 허물어버리고 싶다면 내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수밖에 없고 그 충격은 미비해서 젠가는 여전히 쓰러지지 않고 흔들리고만 있겠지.


 어떤 빌딩에 가도 여전히 흔들리고만 있는 젠가라면 지진에 대처하는 일본의 건물들처럼 마땅히 흔들리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정답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른 곳에서 직접 흔들려보고 싶은 마음. 자소서 결과는 언제 나오나.



이럴 때일수록 피라미드 게임 밖에서의 나를 찾아야 해요. 어떠한 직책에도 얽매여있지 않고 내 마음대로 뭉쳤다가 흐트러뜨릴 수 있는 슬라임과 같은 나의 동그란 세계를. 오늘도 퇴근 후 필라테스와 노래 연습을 하고 집에 돌아가는 참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로봇이라는 별칭을 붙여주었지만, 누구보다도 인간다워지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라고. 오늘 당신의 삶은 어떤 모양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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