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이면, 문득 학창 시절이 떠오른다. 특히 중학교. 그 시절의 기억은 늘 어둡다. 폭력적인 선생들, 무리하게 요구되는 학업 성취. 여학생들에게 손을 뻗는, 교회 집사라는 이름의 체육 선생. 작고 낡은 서울의 중학교는, 그 속에서 살아가던 나는, 고부 갈등이 일상이었던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마음을 둘 곳이 없었다. 학교의 폭력적인 규율은 내 사춘기의 반항을 이겨내고 나를 억눌렀다. 공부가 싫었지만, 성적표는 늘 교실 뒤에 붙어 있었다. 조금도 고려되지 않은 학생 인권, 그 수치스러움을 피하기 위해 나는 시험 기간마다 벼락치기를 하곤 했다. 그럼에도 국어, 영어, 수학 성적은 언제나 엉망이었다.
나를 버티게 했던 것은 오직 사진과 그림이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나는 혼자 방법을 찾아 이것저것 시도했다. 용돈 대부분은 필름과 사진 인화에 썼고, 초등학교 때 쓰던 물감으로 수채화를 그리고, 캐릭터를 그리고, 워크맨을 디자인했다. 친구의 초상화를 그렸지만, 미술 선생님에게서 돌아온 것은 질타뿐이었고, 내가 만든 로고 디자인은 친구에게 표절 시비를 당하기도 했다.
그때 내가 생각했던 오디오 브랜드 이름은 ‘라이카’였다. 하지만 우리 반 아이들은 누구도 ‘라이카’라는 광학 브랜드가 있는 줄 몰랐다. 한국에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그저 외국 오디오 브랜드 같다는 이유로 나를 표절이라며 놀렸다.
디자인이라도, 그림이라도 제대로 해보고 싶어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예전 대만 대사관 근처를 배회했다. 그곳에는 일본 잡지와 디자인 서적을 파는 서점들이 늘어서 있었고, 당시 유행하던 일본 앨범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중학교 2학년의 아이였던 나는, 그곳에서 나도 모르게 꿈을 키웠다. 마치 시네마 천국의 토토처럼.
나보다 더 그림을 잘 그리고, 디자인에 더 관심이 많았던 친구들은 결국 모두 일반 학과로 진학했다. 그들 중 나만이, 그 시절의 꿈을 쫓아갔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빠르게 진로를 선택한 것도 그때의 영향이었다. 내가 너무나 하고 싶었던 공부였기에, 고등학교의 3년은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나는 천재도 아니었고,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를 벗어나게 해준 신문물들은 나에게 끝없는 열정을 주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잊게 했다. 밤새 그림을 그리면서도 피곤하지 않았다. 내가 그린 디자인에서 떨어지는 코피는 마치 팬톤의 딥 레드 같은 색을 만들어냈다. 파란색 153 똥펜은 내가 상상하는 또 다른 세상으로 나를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