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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딘 Jan 09. 2021

애써 좋은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DAY 8 수고롭게 친절했던 그들을 기억하며

2019년 9월 18일

내가 타인에 대해 갖는 인상과 그 사람은 얼마나 닮아있을까.
나쁜 사람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수많은 좋은 사람을 기억하고 신경 쓰자.


6개월 이상 유럽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체류허가를 받아야 한다. 광화문 교보빌딩 27층에 위치한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관을 3번 방문했고, 심지어 나에게 금전적 지원을 약속하는 아빠의 편지를 린츠 시청에 제출해야 했다. 그렇게 받은 허가증은 입국 후 현지 시청에 가서 입국을 증명하면 일주일 후에 찾을 수 있다. 무수한 의심에 대한 증명을 하며 내가 불법체류를 하러 오스트리아로 넘어온 동양인 소녀가 맞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묘한 과정이다.


그리고 오늘은 입국을 증명을 하러 린츠 시청에 갔다.


미로처럼 생긴 린츠 시청의 입구를 겨우 찾아 푸근한 인상의 할아버지께 말을 걸었다. 목적지를 보여드리자 독일어로 알려주셔서 대충 알아들은 척하고 당케셴을 외쳤는데 친히 나를 담당 부서로 데려다주셨다. 번호표를 뽑고 차례가 되어 들어갔더니 창구 직원분은 여기가 아니라며 직접 창구를 비우면서까지 나를 다른 건물로 데려갔다. 가는 길에 독일어로 영어를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다, 나는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독일어 감사하다를 반복했다. 도착한 곳은 다양한 인종으로 채워진 누가 봐도 이주 관련 민원실이었다. 입구에 앉아계신 직원에게 어디로 가야 되냐 물으니 독일어로 화를 내시고 끝에 아!(독일어로 A!) 한 글자 알아들어서 A창구에 가서 줄을 섰다. 들어가서 드디어 영어가 통하는 직원이랑 대화한 결과, 나는 오늘 지문 인증으로 입국을 증명하고 일주일 뒤에 허가증을 찾으러 A창구에 와야 하는 처지임을 알아냈다.


그래서 다시 입구 쪽 직원분께 말씀드리니까 영어로 지금은 지문 등록 못한다더니 안쪽 문을 열고 독일어로 대화하더니 다음부터는 일찍 오라면서 번호표를 하나 뽑아주셨다. 그 앞에 앉아 기다리면서 추론한 결론은, 시청은 오늘 1시 반에 업무를 마치기 때문에 11시 반에 온 나에게 번호표를 줄 수 없었고 문 안쪽과의 대화에서 내 사정을 봐주자는 결론이 나와서 번호표를 준 것 같다. 내 다음에 온 사람에게는 단호하게 내일 아침 7시에 와서 번호표를 받으라고 말했기 때문.


덧붙여 나는 이런 식의 상황 추론에 아주 능하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아서 아무 언어로 쓰인 공지문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알아채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제일 똑똑이니까 나라면 '이런 글을 적어놨겠다', '이런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겠다' 하면 열에 아홉은 정답이다. 독일어 못해도 독일어권 소도시에서 살아남은 비법이다.


시청 앞 노랑 건물과 그렇게 받은 소중한 번호표 한 장


내가 타인에 대해 갖는 기억은 그 사람과 얼마나 닮아있을까.

내가 번호표를 받고 기다려서 오래 걸리더라도 오늘 안에 행정처리를 할 수 있게 된 건 카운터의 그 직원분 덕분이다. 이를 알기 전까지 나는 사실 그 직원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다. 친절한 사람 둘에게 받은 감동이 불친절한 사람 하나 때문에 다 사라져서 그게 무척이나 괘씸했다. 왜 사람들은 굳이 불친절할까.


그런데 알고 보니 반대였다. 내 멋대로 판단하고 미워한 나의 이기적인 사고방식에 놀랐고, 이런 식의 오해가 얼마나 많을지 생각했다. 내가 고마워했던 사람의 의도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 수 있다. 내가 원망했던 사람은 누구보다 나를 위한 의도를 가졌을 수 있다.


내가 타인에 대해 갖는 기억은 그 사람과 얼마나 닮아있을까. 또 나는 남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었을까.




불친절을 특별하게 만드는 수많은 친절함을 기억하자.


분명 더 신경 쓰이는 건 나쁘게 느껴지는, 나쁠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애써 좋은 사람을 기억하고 신경 써야 한다. 수고롭게 친절함을 베푼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한 친구는 어렸을 때 아빠한테 뉴스엔 나쁜 사람들밖에 안 나오는데 왜 교과서는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냐고 물었다. 지혜로운 친구의 아버지는 착한 사람이 더 많아서 나쁜 사람이 더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나는 내가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드는 일이 아니면 나서지 않고, 심지어 그런 일들에도 귀찮아서 못하는 척하곤 했다. 그런데 여기 린츠 사람들은 구태여 할 줄 모르는 것도 같이 알아가려 시도한다. 그래서 종종 날 도와주려는데 결국 실패하거나 나 스스로 해결해버리는 상황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럼에도 땡큐를 말하지만 그 사람이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 사과하는 이상한 상황이 된다. 학교의 프린트기로 인쇄하는 법을 알려주려 애쓴 학생은 10분가량 나와 함께 씨름하다 포기하고 그 옆의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서 결국 내가 인쇄하는 법을 알려줬다. 기숙사에서 공용 주방의 선반이 고장 나서 고치는 중에 말을 건 학생도 그랬다. 도와줄까 물어보길래 괜찮다고 이거 안 고쳐진다 했는데 굳이 와서 시도하다 결국 미안하다고 포기했다.


내가 기억해야 할 건 성의없는 불친절이 아니라
수고로운 친절함을 베푸는 좋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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