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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그레이 Aug 23. 2023

'T친놈'의 항변

T중에서는 F, F중에서는 T인 나

바야흐로 약 20 년 전, 혈액형으로 사람의 성향을 구분하는 게 대유행이었다.


Z세대라면 실소할 일이지만 진짜다.

2005년도에는 'B형 남자친구'라는 제목의 영화도 만들어졌더랬다.

지금으로 치환하면 'ENFP 남자친구'같은 거다.


우주만큼 복잡한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 단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반론도 거셌다.

때문에 내 기억으로는 반은 믿고 반은 '우스개 소리' 선에서 유행은 사그라들었다.


그런데 지금의 MBTI열풍은 그때와는 양상이 조금 다른 듯하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MBTI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거의 종교 수준이다.

4지선다보다는 16지 선다가 더 정교하고, 신뢰도가 높아 보이기 때문일까?   

여기저기서 '너~~ 무 정확해요~'라는 찬사가 쏟아진다.

 

이제는 상대의 MBTI 유형을 묻는 게 보편적이 됐다.

나 또한 학생들과의 상담 현장에서 적극 활용 중이다.

특히 처음 만난 학생과 침묵을 깨고 라포를 형성하는 데에 이보다 유용한 게 없다.   

'요새 어떻게 지내요?' 보다는 '혹시, MBTI 0000 아니에요?'라는 물음에 나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빛이 훨씬 반짝이기 때문이다. 간편한기 그지없는 아이스브레이킹 도구이다.




하지만 나의 우려는 따로 있다.

바로 수많은 사람들이 MBTI를 활용하는 '잘못된 방식' 때문이다.  


내가 겪어본 바로 사람들이 상대의 MBTI를 궁금해하는 타이밍은 두 번으로 좁혀진다.

타인과의 첫 대면 그리고 원래 알던 사람과의 대화 도중이다.

의미하는 바를 정리해 보면 이렇다.


타인과의 첫 대면에서 묻는 MBTI는 상대가 어떤 성향을 지닌 사람인지 5초 만에 '단정'짓는데 쓰인다.

상대의 MBTI를 아는 순간 머릿속에는 '나랑 잘 맞네? 나랑 안 맞네? 내가 싫어하는 유형이네?'와 같은 짙은 편견이 자리 잡는다. 상대는 이제 그 어떤 생각을 말해도 해당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한다. vise versa.

대화가 즐거울 리가 없다.  

 

두 번째, 지인과의 대화 도중 느닷없이 묻는 MBTI는 '갑자기 나랑 안 통하는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 때

등장한다.  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거나, 이견을 가진 지인에 대한 내적 불쾌감을 1초 만에 진화하기 위함이다.  추가적인 논쟁도 필요 없다.  상대의 MBTI가 내가 의혹하던 '그것'이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  '아, 그래서 그렇구나~'가 돼버리며 화제는 곧바로 전환된다.  상대의 생각을 묵살하는 데 이보다 간편한 방법이 없다.




MBTI는 개인의 선천적인 '선호 경향성'을 알아보고, 직업적인 불만족 원인을 탐색하거나 혹은 대안을 찾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경향성'은 말 그대로 'A 또는 B  중에  누구는 대체적으로 A이고, 또 다른 누구는 대체적으로 B를 선택한다'라는 확률적인 개념이다.

여기 어디에도 'A 아니면 B이다'식의 흑백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러한 '경향'에 대한 판단 주체는 100% 개인의 주관에 의존한다.

마치 이런 거다.  

토익 점수 800점을 받은 피검사 A는 스스로의 영어 실력에 대해 '매우 잘한다'라고 답했다.

반면 동일한 점수를 지닌 피검사 B는 '보통이다'라고 답하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결국 자신의 선호 경향에 대해서 얼마나 '관대하게' 혹은 '엄격하게' 스스로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동일한 유형 내에서 각 요소별 성향이 지닌 '정도(=MBTI에서는 '분명도 지수'라고 표현한다)'는 카운팅이 불가한 수준으로 제각각이며, 이는 곧 천양지차의 표출방식을 만들어낸다.  


16가지 성격 유형은 '선호 직업군'의 개념이다.

비유하면 특정 유형이 '공무원'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집합일 뿐, 그 사람들의 특성이 '똑같다'는 뜻은 아니다.


MBTI 유형만으로는 이 세상의 누구도 심플하게 규정될 수 없는 이유이다.




특히 4가지 유형 중 최근 가장 많은 '밈'을 생성하고 있는 3번째 기능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왜냐하면 나도 요즘 말로 'T친놈'으로 분류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 T구나? 너 T야? 너 T친놈이지?


우선  T와 F를 구분하는'주제체계'인, '판단기능'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이는 의사 결정에 있어 두 가지 요소 중 어떤 쪽의 에너지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는가를 설명한다.  


T유형은 Thinking의 약자로 '논리성과 합리성'을, F는 Feeling의 약자로 '사람과의 관계나 감정'을 판단의 주된(main) 근거로 삼는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T유형이라도 당연히 F가 있고, F유형이라도 당연히 T가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일종의 제로섬이다.


때문에 F는 절대적으로 공감능력이 탁월한 사람, T는  절대적으로 '감정 없는 냉혈한' 취급하며 마치 상당히 문제 있는 사람인 것처럼 묘사하는 행태는 결코 옳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T에게도 따뜻한 심장이 있으며,

F에게도 논리적인 사고능력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FP의 지인보다 TJ인 내가 사소한 일에 더 많이 감동받고, 공감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애당초 무형적인 인간의 내면을 '유형화'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심리학자들이 성격을 유형화한 이유는 '상호 이해에 기반한 인간사회 적응'을 위함이다.


서로가 지닌 특성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인다면,

자기 기준에서만 타인을 무분별하게 비난, 공격, 비판, 조롱, 평가, 판단 행위가 줄어들고,  조화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본다.


결과적으로 현존하는 모든 성격유형검사의 지향점은

'나도 옳지만, 너도 옳아'이다.  


I'm OK, You're OK



때문에 현재의 이 유행이 일시적이지 않다면,

MBTI로 상대를 손쉽게 '판단'하기보다는, 타인의 다양성을 '파악'하는 도구로서 활용되었으면 한다.


필연적으로 사람들과 얼기설기 어울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이다.

'나만 옳다'는 식의 사고로는 인간 사회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다.

 

가장 빠르고, 가장 쉬운 길이 현대 사회의 미덕이지만 '장인정신, 교육, 양성, 양육, 전문성, 신뢰'처럼 오랜 시간과 노력을 필수 연료로 하는 가치들이 엄연히 공존하고 있다.   

인간 관계도 그중 하나라고 본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시간을 내서 얼굴을 보고,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며, 여러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중에 보이는 상대의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들로 '아~ 이런 사람이구나..'를 파악해 나가는 과정은

적지 않은 수고로움만큼이나 견고한 관계의 기둥이 된다.


참 모순적이다.

누가 나를 '쉽게' 판단하는 데는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라며 대노(大怒)하면서도,   

내가 남을 '쉽게' 판단하는 데는 지나치게 확신에 찬 모습들을 자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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