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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터러시 멘토 Jul 11. 2022

잠자리 독서

시공을 넘나드는 마법

엄마가 가장 분주한 시간 중 하나는 아이들을 재우는 시간입니다. 우선 아이들이 잘 마음을 먹고, 하던 놀이를 멈추도록 도와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의 경우는 잠자기 전 씻기는 일, 특히 중요한 이 닦는 일을 챙겨야 합니다. 잠옷으로 갈아입히고, 잠자리도 점검합니다. 여름이면 모기장, 겨울이면 가습기 등 엄마의 노련하고 빠른 손이 필요합니다. 엄마가 조금씩 준비를 해 둔 경우는 그나마 낫지만, 직장에서 늦게 돌아와서 시간이 부족하거나, 누구라도 아프거나, 특별한 외출이 있는 경우라면 잠자리 준비를 평소보다 훨씬 더 빠르게 해치워야 합니다. 엄마의 머릿속에는 아이들을 재울 일 말고도, 아이들이 자고 난 뒤에 벌어질 일들도 잔뜩 들어 있습니다. 집안 곳곳에 남아 있는 집안일들, 내일을 위해 준비해야 할 일들, 아니면 오늘 아직 풀지 못한 오늘의 감정, 혹은 여러 날 모아두었던 스트레스. 그래서 아이들 잠자리 독서는 참 만만치 않습니다.


제 경우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잠자리 준비를 할 때면 늘 정신이 없었습니다. 예민한 딸을 씻기고 바르고, 입히기까지 아이에게 맞춰주려면 엄마가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하루 종일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땀 흘리며 열심히 하루를 산 아이. 세 끼 식사와 간식을 먹으며, 친구들과 여러 일들을 겪고 온 아이. 아이는 엄마가 보지 않은 순간에도 뼈가 자라고, 살이 붙고, 머리가 커졌는데, 그래서 엄마는 그 아이를 바라보며, 따뜻하게 대해줘야 하는데, 엄마는 그 아이를 바라볼 여유가 없고 마음이 급하기만 했습니다. 편식도 심하고, 잠도 별로 없어서 키가 크지 않으면 어쩌지? 오늘 밤 너무 더워서 자다가 답답해서 중간에 깨면 어쩌지? 추워서 감기에 걸리면 어쩌지? 아이를 바라볼 마음보단 이런저런 걱정만 앞서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빨리 자자고 채근하기에 바쁩니다. 아이가 엄마의 지시에 따라 빨리빨리 움직이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하니 아이에게 좋은 소리가 안 나옵니다. 그 짧은 준비 시간에도 엄마의 미안함은 더해집니다. 잠 잘 준비가 다 되어 갈 때야, 엄마는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책을 고릅니다.  


책을 골라 아이 옆에서 자리 잡고 있으면, 그 짧은 순간 오늘 아이에게 더 따뜻하게 해 주지 못한 것, 더 여유 있게 대해주지 못한 것이 비로소 떠오릅니다. 이렇게 하루가 또 끝나는데 왜 그렇게 심하게 혼냈을까 자책도 하게 됩니다. 엄마는 하루 분량의 사랑을 다 주지 못한 아쉬움을 잠자리 독서로 보충하자고 마음을 먹습니다. 아이는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알 리가 없습니다.


“엄마~ 오늘은 무슨 책이야?”

“음~ 새로 사 온 책 있어. 재밌을 것 같아.”

“응,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그 책도.”

“응. 딱 두 권만.”

“아니, 세 권~”

“알았어. 딱 세 권~”


새로 산 그림책을 꺼내 아이가 좋아할지 궁금해하며 읽기를 시작합니다. 엄마는 해야 할 일을 지시하고 잘못한 점을 나무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습니다. 평온하고, 부드러우며 따뜻한 목소리로 책을 읽습니다. 엄마도 무슨 내용일까 궁금해하며 책을 읽습니다. 아이는 귀를 열고 엄마의 익숙한 목소리에 반응합니다. 눈을 감고 듣고 있다가도, 가끔은 그림이 갑자기 궁금해졌는지 페이지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아~~!” 자기가 상상했던 그림과 같나 다르나 졸린 눈을 가슴츠레 뜨고 보는 모습이 귀엽습니다. 마지막으로 몇 번이나 읽어 이제는 내용을 훤히 다 꿰고 있는 책까지 한 번 더 듣고 나서야 아이는 잠잘 생각을 할 건가 봅니다. 새것도 좋지만, 헌 것이 더 좋은 가 봅니다.


엄마는 매일 보는 책이 가끔은 지겹습니다. 예전에 개발한 동화구연 장기를 발휘해봅니다.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잠결에도 아이가 반응을 합니다.

“엄마~ 그냥 지난번처럼 읽어줘~”

엄마는 머쓱합니다.


또 어떤 날은 성공입니다.

“엄마, 참 재밌는 사람이야.”

엄마는 더 힘이 납니다.  


‘딸아~ 오늘도 잘 지내줘서 고마워. 그리고 엄마가 더 잘 못해줘서 미안해. 그림책에 나오는 엄마와 딸처럼, 곰돌이와 고양이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거 너도 알지?’


이런 마음을 담아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갑니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아이는 미소를 머금고 잠에 빠져 듭니다. 오늘도 성공! 엄마도 잠자리 독서를 통해 해피엔딩의 맛을 음미하며 하루치의 위로와 행복을 충전합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오늘도 조금은 더 힘이 날 것만 같습니다.


첫째 아이의 경우는 잠자리 독서가 동생 때문에 길어져서 거의 초등 6학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조금은 예민한 딸과 넉넉지 않은 집안 사정, 저질 체력, 또 직장으로 교회로 바쁘게 뛰어다닌 엄마라 아이의 맘에 상처도 많이 주고, 아이의 원대로 해 준 것이 별로 없어 미안하지만, 잠자리 독서 때문에, 그 짧은 시간, 그러나 매일의 시간, 그리고 수준 높은 작가들의 표현을 통해 들려준 그 수많은 이야기 덕분에 조금은 덜 미안합니다. 둘째가 생기고 잠자리 독서는 언니 반, 동생 반으로 나눠야 했지만, 아이들은 함께 한 그 짧은 시간의 진한 행복함을 느끼며 깊은 잠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가끔 엄마 대신 아빠가 읽어주는 날은 참 신기하게도 한 권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곯아떨어집니다. 저는 남편의 비결이 궁금해서 몰래 들여다보았습니다. 비결은 간단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책을 후루룩 말아먹는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입니다. 빠른 속도로 글자를 마구 읽어가는 아빠의 책 읽기는 아이들에게 이야기에 빠질 틈을 주지 않습니다. 귀를 기울여봤자 뭔 말인지 몰라 재미가 없을 것 같다는 백 프로 확신에 아이들은 달콤한 잠을 선택합니다. 높낮이가 없는 아빠의 책 읽기가 주문을 외우는 것 마냥 수리수리 마수리 잠을 부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엄마는 이 시간을 너무 즐겼나 봅니다. 잠자리 독서는 너무 좋지만 한 권 더, 한 권 더 길어지는 독서로 자꾸 자는 시간이 늦춰져서 마음이 불안할 때도 많았는데, 아빠의 잠자리 독서는 거의 수면 제급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매번 아빠 말고 엄마를 외쳐댔습니다.



잠자리 독서라는 마법



오랜 경험을 통해 저는 이렇게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잠자리 독서는 ‘책의 역사’를 만들기에 가장 좋은 시작이자, 하루의 가장 좋은 끝이다." 아이들을 재우는 매일매일의 시간, 아이들은 세상에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모험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 모험은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엄마의 목소리와 또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이불과 베개, 인형 덕분에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모험이 됩니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Ande Gut Alles Gut)는 독일의 속담처럼 잠자리 독서는 하루 중 어떤 일이 있었더라도 하루의 끝을 좋은 것으로 만드는 마법의 시간입니다.


원래 이야기란 것이 부모나 조부모의 무릎에서 들으며 세대를 거치며 전해지던 것이라, 베드 타임 스토리는 가장 안전한 곳, 가장 편안한 시간에 듣는 가장 재미나고, 가장 아찔한 상상과 모험이라는 일종의 문학적 역설입니다.


그림책은 원래 읽어주는 책으로 기획된 것이라 그림책의 이야기는 소리 내어 읽어야 제 맛입니다. 엄마가 먼저 잠자리 독서를 통해 자연스럽게 입에 착착 붙도록 그림책을 읽어줄 때, 아이는 낮에 그 소리를 기억하며 다시 똑같은 그림책을 눈으로도 보고, 입으로도 봅니다. 그림책은 아이의 성장 단계에 맞춘 소재가 많아서 재미나게 읽은 그림책으로 놀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림책은 원래 그림 작가의 것이므로, 잠자리 독서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낮에 그림을 보고 마치 미술관에 간 것과 같은 예술적인 체험도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작가의 그림책은 글맛, 그림 맛이 좋아 엄마는 혼자서는 도저히 해 줄 수 없었던 문학과 예술의 수준 높은 문화를 향유하게 도와줍니다. 이 시대의 우리 작가들, 세계 곳곳의 세계적인 작가들, 그리고 우리의 전래 동화들 모두 잠자리 독서에 좋은 재료들입니다.


잠자리 독서는 아이를 키우면서 정말 잘했다고 생각되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잠자리 독서는 감정의 마법, 이야기의 마법, 언어의 마법도 부립니다. 그것이 미래를 결정하는 마법이 됩니다. 다 자라 중학생이 되어도 엄마가 여러 번 읽어주던 동화책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그 동화책을 듣던 순간들도 아이 속에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쌓여 있습니다. 잠자리 독서를 통해 사춘기가 되기 전에 쌓아야 할 부모와의 관계, 사랑의 저축은행에 충분한 사랑과 긍정성이 쌓입니다. 아이가 커가면서 인간으로서 발견해가야만 하는 행간의 비밀, 맥락의 의미들이 그림책 이야기를 통해 서사의 저축은행에 충분히 쌓입니다. 학습을 통해서는 접근할 수 없는 언어력이 언어의 저축은행에 충분히 쌓입니다. 이제 아이들은 ‘독자’로 첫 장을 열었습니다. 이제 ‘어린이 독자’에서 ‘청소년 독자’로, 초보 독서가에서 숙련된 독서가로 자라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책’과 가장 가까워지게 만드는, ‘이야기’를 사랑하게 만드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있는 아이로 키우게 되는, 그러나 무엇보다 나와 아이의 관계의 수준이 높아지는 그런 놀라운 기적이 잠자리 독서에 있습니다. 이렇게 작지만 거창하게 개인의 ‘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0년이 넘는 잠자리 독서를 졸업하고 보니 빨리 재워야 한다는 강박이 잠자리 독서를 방해하지는 않았나, 아빠와 그림책 읽기 기술을 공유해서 아빠에겐 육아의 기쁨과 보람을 나누고, 아이들에겐 아빠의 목소리를 들려주면 더 좋았지 않았나 하는 후회 혹은 아쉬움도 듭니다.


부모 편에서는 잠자리 독서에 집중하면, 덤으로 부모도 그림책 읽는 어른, 어린이 책 읽는 어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아이 키우는 어른이 갖추면 가장 좋은 ‘동심’을 회복하게 되는 것이죠. 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큰 선물입니다. 사실은 동심뿐 아니라 그 시절 우리가 누리지 못했던 그림책, 어린이 책을 통해 이 시대의 예술성, 감성, 문학성을 호흡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잠자리 독서의 엔딩은 아이가 특별히 좋아하는 그림책을 모아두는 ‘나의 책장’ 꾸미기입니다. 그림책은 구매할 때 다른 책들에 비해 더 비싸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중고에 내놓으면 꽤나 잘 팔리는 책인 데다 친척이나 옆집 동생에게 나눠주기도 너무 좋은 책이지만, 아이가 특별히 좋아했던 책은 절대 처분하지 말고, 만일 도서관에서 빌려봤던 책이라면 직접 사서 아이들의 책장 한쪽에 꽂아두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것을 ‘소중한 가보’, ‘위대한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5년 후에도 10년 후에도 그 이후에도 자신들의 첫사랑을 꺼내볼 것입니다. ‘문해력’ 나무의 뿌리가 튼튼해지는 첫 번째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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