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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건축가 May 24. 2022

재회

건축소설: 내 집을 지어보고 싶습니다 # 17


피터 아이젠만 - 하우스 6

실험적인 이론가이자 철학, 건축가인 피터 아이젠만의 주택 연작 중 여섯 번째 작품. 이 주택 시리즈는 11번까지 계속되었다. 반복되고 지루한 모더니즘에 대한 대안을 찾던 많은 건축가들은 포스트 모던으로 방향을 틀었다. 원래 뉴욕 파이브의 일원으로 모더니즘의 후계자를 자처했던 피터 아이젠만이지만, 뉴욕 파이브가 각자의 길로 갈라지면서 해체주의의 선구자로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이 주택 역시 모더니즘 스타일 주택의 벽과 기둥, 보 등의 요소들을 뜯어놓고 비틀어놓은 듯한 특유의 언어가 느껴진다. 그가 건축이론과 적용에만 관심을 둔 건축가였기에, 실제 시공하기가 쉽지 않았고 각종 하자 역시 많았다고 전해진다.


 





민영은 심란한 마음에 차마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퇴근한 이후 잠자리에서 한참을 뒤척이다 핸드폰을 꺼내서 만지작거린다. 문자를 썼다 지웠다 여러 번 한 끝에..


‘오빠 오랜만이네. 난 잘 지내. 그런데 이렇게 연락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앞으로 연락하지 말아 줘. 부탁할게.’


‘..이 정도로 보내자. 이 정도면 알아듣지 않으려나.. ’


마음은 심란하지만 그래도 답장은 보내야 할 것 같아 큰맘 먹고 전송 버튼을 꾹 누른다.

조금 있다 바로 답장이 왔다.


‘민영아. 니 심정 이해해. 내가 정말 밉겠지. 쳐다보기도 싫을 거야. 그래도 이렇게 대답해줘서 고마워. 나 요새 정말 힘들어.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너한테 그렇게 대한 거 천벌 받는 것 같은 심정이야. 그래서 니 생각이 더 많이 나. 혹시 한 번만 만나줄 수 있을까? 다시 잘해보자 이런 말 안 할 테니까. 니 얼굴 보면 좀 위로가 될 것 같아서 그래.’


역시 뭔가 설득력 있게 말을 잘한다. 예전부터 이 오빠의 감언이설에 속아서 얼마나 많은 걸 바쳤었나.. 항상 그랬었지. 이번엔 그저 얼굴만 비춰달라.. 이런 건가. 하지만 막상 만나면 그렇게 끝날 리가 없다. 여기서 딱 잘라서 끊어야 한다.


‘아니야. 됐어. 난 오빠 더 이상 연락하기도 싫고, 만나기도 싫어. 나 좀 내버려 둬. 부탁할게. 오빠 말에 대답하는 건 이게 마지막이야.’


조금 지나니 다시 답장이 왔다.


‘그래. 니가 이러는 거 이해해. 알았어. 하지만 나도 이 정도로 쉽게 포기할 정도의 각오로 연락한 건 아니야. 니 마음 풀어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야. 오늘은 잘 쉬고 또 연락할게.’


음.. 이런 문자를 봐도 참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민영이다. 그날은 다행히 더 이상 연락은 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다. 다행히 준수에게선 정말로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민영은 이 오빠가 포기한 건가.. 싶으면서도 아직은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사실 정말 이렇게 쉽게 포기하는 건가..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갑자기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스노우 건축사사무소입니다.”


“.. 민영이구나. 역시 이 사무소가 맞네.”


준수오빠다. 어떻게 이 번호를 알았지?


“오빠.. 이 번호 어떻게 알았어?”


“네이버에 쳐봤지. 설민영 건축가로 검색하니 나오던데. 너 홈페이지 열심히 해놨더라. 잘하고 있는 것 같던데. 보기 좋아.”


“... 그래. 어떻게든 하고 있지. 오빠가 포기하고 때려치운 설계 사무소 나 혼자 어떻게든 해보려고 아등바등하고 있어.”


말하면서도 민영은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래. 미안해 민영아. 그래서 나 너 도와주고 싶어. 이제라도.. 같이 하면 안 될까? 둘이 하면 훨씬 할만할 거야. 예전에 약속했던 대로 하면 되잖아. 사실 바뀐 건 하나도 없어.”


이 말을 듣는 순간 민영은 뭔가 이 사람 말에 홀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안 그래도 혼자 사무실을 운영하는 데 벅차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이 사람이 도와주면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옛날 일 다 잊고 잘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순간 지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정신 바짝 차려야지. 직접 얼굴 본 것도 아니고, 전화 한 번에 이렇게 흔들리면 안 돼.


“왜, 잘 나가는 00 공사 갔잖아. 거기서 돈 잘 벌고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하는 거 아니었어? 갑자기 왜 이래? 뭐가 잘못된 거야?”


“그래.. 갔었지.. 좋은 데 갔었지. 그건 정말 잘못했어. 니가 날 얼마나 챙겨주고 뒷바라지해줬는데.. 그땐 뭔가 눈이 멀었었나 봐. 내가 좀 가난하게 살았잖아. 그래서 잘 사는 거, 돈 많이 버는 거에 눈이 멀었어. 그래서 그런 선택을 했었어.. 나 그 여자랑 헤어졌어. 잘 안 맞더라고.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하니까.. 설계만 해온 나랑은 좀 안 맞았어. 계속 싸우게 되고... 그때마다 민영이 니 생각이 많이 났어.”


“그래서. 그 여자랑 헤어지게 되니까 나보고 다시 만나 달라고? 난 무슨 보험이야? 오빠가 다른 여자 만나서 잘 안되면 돌아올 수 있는?”


“니가 무슨 말을 해도 할 말이 없어.. 무슨 말을 해도 변명처럼 들리겠지. 하지만 그렇게 돌고 돌아 니가 답이라는 걸 알게 됐어. 그렇게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나한텐 너뿐이라는 걸 더 정확하게 알게 됐다는 거야. 아무튼 지금 내 심정은 그래.”


“됐어. 아무 말도 하지 마. 난 오빠한테 너무 큰 상처를 받았어. 오빠가 무슨 말을 해도 못 믿겠어.”


“그래. 니 심정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나도 니가 나 싫다고 해서 금방 포기할 정도의 각오로 연락한 건 아냐. 전에도 말했지만.. 니가 나 다시 받아줄 때까지 계속 다가갈 생각이야. 아무튼 오늘은 이 정도로 끊을게.”


“... 오빤 그 00 공사는 계속 다니는 거야?”


민영은 준수가 걱정스러워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물어보고 말았다.


“글쎄.. 아직은 다니고 있지만 니가 나 받아준다면 당장 퇴사해서 너랑 같이 일할 생각이야. 우리가 했던 약속 난 항상 잊지 않고 있어. 우리 사무실 같이 키워야지. 내가 잠시 미쳤었던 거라고 생각해줘. 난 진심이야. 날 믿어줘 민영아.”


이 말에 민영은 크게 흔들리는 걸 느꼈다. 우리 사무실.. 그래. 이 오빠랑 사무실 차리고 꾸밀 생각에 설렜던 날들이 있었지.. 어렵고 힘들더라도 같이 이겨내자고 했던 약속도 했고.. 이 사람만 정신 차리면 괜찮지 않을까? 나만 받아들여 준다면 어떻게든 이겨내고 잘 해갈 수 있지 않을까?


“.. 일단 끊을게. 잘 지내 오빠.”


간신히 전화를 끊고 민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혜랑 전화할 때는 그렇게 모질게 대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문자 한번, 전화 한 번에 이렇게 크게 흔들릴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홀로 외롭게 사무실을 지켜오면서 알게 모르게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민영은 심란해서 일에 손이 가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하다 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그래. 민영아. 웬일이야.”


“지혜야, 준수오빠가 진짜 연락이 왔어. 나 어떡하지.”


“진짜? 그 인간 진짜 말종이다. 사람인가 싶네. 낯짝이 있으면 그냥 잠자코 살아야지.. 기어코 너한테.. 아이고.”


“나 어떡하지 지혜야.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어.”


지혜는 마음 약한 민영이 한심하고 안타깝다.


“야, 어떡하긴 뭘 어떡해. 기집애야 정신 차려. 그 인간이 뭔 생각하는지 정말 몰라?”


“옛날 일 다 잊고 나랑 같이 사무실 잘해보고 싶대.. 자기가 미쳤었다고, 용서해달래..”


“그니까 그 말을 믿냐구. 그냥 00 공사에서 쫓겨나니까 갈 데 없어서 너한테 기대는 거잖아. 얼마나 기댈 데가 없으면 너한테 그러겠니. 민영아, 그 인간 전화번호 지우고 차단하고.. 암튼 다 싹 끊어버려. 안 그러면 계속 그럴 거야.”


“오늘은 사무실 번호로 전화했더라고. 네이버에 찾으니 홈페이지 다 나온다고..”


“그 인간 집요하네.. 그렇게 다 찾아보고 있구나. 암튼 다 끊어. 만약에 찾아와도 만나지 말고. 알았지?”


“근데.. 그 오빠가 진심이면 어떡하지? 정말 정신 차리고 나랑 잘해보고 싶을 수도 있잖아.”


지혜는 민영이 이미 많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민영아, 내 말 똑바로 들어. 니가 사무실 혼자 운영하느라고 외롭고 힘든 건 알겠는데. 그 자식은 진짜 아니야. 지금까지 해온 걸 보면 알잖아. 이러고 또 속으면 그땐 니가 진짜 바본거야. 알았지? 너 혹시 그 자식이랑 다시 만나면 나 너 다시는 안 본다.”


“지혜야.. 그게 맞겠지? 머리로는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솔직히 가슴으로는 흔들리는 게 느껴져서..”


“또 찾아오거나 하면 쫓아버려. 아님 나를 불러. 알았지? 아무튼 정신 바짝 차려야 돼.”


지혜는 민영이 걱정스러웠다. 조만간 지민이랑 같이 가서 맘을 잡아 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민영이 심란해하고 있는데, 그때 지훈의 전화가 왔다.


“소장님, 저희 내일 보는 거 잊지 않고 계시죠? 맛있는 거 사주셔야 돼요. 그 근방에 맛집 있나 찾아보고 가려고요.”


“네.. 네. 지훈 씨. 내일 봬요..”

지훈은 민영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소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목소리가 많이 안 좋네요.”


“아, 아니에요. 지훈 씨. 괜찮아요. 내일 봬요.”


지훈은 민영이 걱정되면서도 내일 데이트를 한다는 생각에 들떴다.






'내 집을 지어보고 싶습니다' 예전 연재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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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설계와 소통으로 건축주, 시공사와 함께하는 건축을 만들어갑니다.


OPEN STUDIO ARCHITECTURE

글쓰는 건축가 김선동의 오픈 스튜디오 건축사사무소


김선동

Kim Seondong

대표소장 / 건축사

Architect (KI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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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ratm8203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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