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새로운 챕터
(2018.6.)
짐을 어떻게 싸야 할지 정말 모르겠더라고.
기내용 캐리어 하나, 그리고 그것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의 캐리어 하나, 그리고 백팩.
이렇게 며칠 동안 짐을 싸놓고는 공항으로 가는 남자 친구의 차 안에서 까지 고민을 했어.
'내가 너무 많이 가져가나? 이걸 다 끌고 나중에 여행을 다닐 수 있을까? 공항에서 작은 것은 그냥 집으로 돌려보낼까?'
그때는 꽤 심각하게 고민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거였어. 나는 영국에서 추워지기 전에 따뜻한 나라로 넘어갈 생각에 겨울옷은 하나도 챙기지 않았는데 결국 영국에서 겨울을 보냈거든. 겨울옷을 사느라 돈을 좀 낭비하며 내가 왜 그랬을까 후회를 했지만 인생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 아니겠어? 아무리 고민을 해도 내가 앞을 완벽히 내다볼 수는 없는 거야.
여행을 좋아해서 비행기를 많이 타봤던 탓인지 아니면 잠이 덜 깬 탓인지 인천 공항에 도착해서도 내가 정말 영국으로 떠나는 게 맞는지 실감이 잘 안 났어. 심지어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없는 편도행 티켓을 끊었는데도 말이야.
브리티시 항공편에 자리를 찾아 앉아서 남자 친구가 준 편지를 읽으니까 울컥 눈물이 나더라.
'꼭 건강해. 네가 건강하기만 하면 나는 언제까지나 너를 기다리면서 돈 벌고 있을게.'
꽤나 감동적이었지.
내가 퇴직을 결정하던 순간부터 영국으로 떠나는 순간까지 6개월 정도. 이기적인 연애를 했음에도, 기약 없이 떠나면서 편지 한 장 써주지 않은 나에게 이런 마음을 주다니. 고마움과 미안함이 함께 몰려왔고 그제서야 내 인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진짜 모험이 시작된 것 같더라고.
원래 예민한 나는 비행기 안에서 거의 잠을 자지 못했어. 비몽사몽 공항에 도착했는데 만나기로 한 사람이 있었어. 나처럼 그곳의 봉사자로 오게 된 친구 K였지. 출발하기 전 날, 영국에서 메일을 받았어. 나랑 같은 날 도착하는 한국 사람이 있으니까 연락처를 알려줄 테니 같이 오라는 거야. 이게 진짜 신기한 건데, 그 당시 영국 YWAM 베이스에는 100명가량의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었지만 한국인은 나 포함 3명이었거든. 그런데 같은 봉사자의 신분으로 같은 날, 한 시간 차이로, 같은 공항에 도착하는 한국인이 있다는 거지.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는데 말이야. 나보다 8살 어린 K에게 나중에 친해지고 들은 이야기인데, 그 친구가 내 연락처를 받았을 때 설레는 마음으로 카톡을 추가했대. 그때 내 카톡 프로필에는 첫 차를 팔면서 아쉬운 마음에 '잘 가 붕붕이' 이렇게 차랑 같이 찍은 사진이 있었거든? K는 내가 자신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하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대.
'이 사람 벌써 차가 있나 봐. 좀 잘 사는 것 같아. 나랑 얘기가 안 통하면 어쩌지?'
그 얘기를 듣고 재밌었어.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사실 나는 개털인데.
영국 히드로 공항에서 만난 K와 베이스를 찾아가기 위해 공항을 나와 버스를 타려고 기다렸어. 세인트 올반스(St. Albans)라는 곳까지 우리가 찾아가면 누군가 픽업을 나오기로 했었는데, 사실 K가 없었으면 어떻게 찾아갔을지 모르겠어. 비행기에서 잠을 거의 못 자서 버스를 타자마자 상모 돌리기를 하듯이 잠이 들었거든. 그래도 영국의 여름 하늘만큼은 정말 파랬어.
정신없이 자다가 세인트 올반스(St. Albans) 역에 내렸어. 사실 우리는 어디서 내려야 하나 버스 안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잠깐 멈춘 버스 정류장에서 백발의 인상 좋으신 백인 할머니 P가 우리를 보고 내리라고 손짓을 하시더라고. 우리는 어? 어?! 하면서 큰 캐리어들을 들고 내렸어.
"우리가 우리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 안 오길래 지나가는 버스마다 쳐다보고 있었지. 그런데 동양인 두 명인 너희를 보자마자 '얘네구나' 싶었지."
런던 북쪽의 이 지역은 관광객이 오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동양인을 찾아보기 힘든 거지. 그래서 우리는 다행히 헤매지 않고 P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던 거야. 그분의 빨간색(한국으로 치면 빨간색 옛날 프라이드 같은) 올드카에 우리의 짐을 싣고 하펜든(Harpenden)으로 향했어. 그때 차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도 안나. 긴 여정 끝에 정신이 없는 채로 잠에서 깨어서 갑자기 영어로 대화를 해야 되는 상황인 거야. 그냥 내가 영국 드라마 안에 있는 것 같은 몽롱한 기분이었지.
그렇게 아름다운 풀밭의 하펜든 베이스에 도착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