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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Dec 01. 2023

검은 머리는 파뿌리가 되기 싫다

나를 울고 웃게 만드는 너희들

"선생님도 할머니예요?"


수업 중에 하윤이가 크게 외쳤다. 조용하기도 했지만 원체 목소리가 큰 아이여서 더 놀랐다. 나도 모르게 "뭐! 갑자기?"라고 말해버렸다.


그렇다, 초등학교 1학년 친구들은 ‘갑자기’ 묻는다. "결혼했어요?" “아이가 있어요?” “남편도 있어요?” 하면서 깜짝 놀란 토끼눈이 된다. 나 원 참, 눈이 똥그래지긴 나도 마찬가지다. 왜 그게 궁금한지, 왜 딱 보면  모르는지 황당해서 말이다.


하기야 살아온 삶이 채 십 년도 안 된 아이들이 사람의 얼굴에 나이가 쓰여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겠는가. 나만 해도 어릴 때 신기했던 게 어른들은 사람 나이를 대번에 알아맞힌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뉴스나 형사가 나오는 드라마를 볼 때마다 자주 놀랐는데, 목격자들은 스치듯이 봤던 범인에 대해 말하면서 30대 중반이니 40대 초반이니 하면서 실제 나이를 알아맞혔기 때문이다. 그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와 어떻게 그걸 알지? 정말 대단한데!" 하면서 놀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여간 하윤이의 느닷없는 외침을 듣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이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내게로 향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할머니가 맞긴 하다. 8남매의 막내인 남편에게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누나들이 있고 그들의 자식, 그러니까 나에게 시조카가 되는 이들 진작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으니 따지자면 나는 마흔도 되기 전에 이미 '할머니'인 상태였다. 그렇지만 내 자식들이 아직 10대인데 어찌 할머니일 수 있겠는가?


1학년 아이들에게 "그래 맞다! 나는 할머니다!"라고 솔직하게 불자니 괜히 억울했으며 대답을 안 하자니 진짜 할머니라고 생각하면 어떡하나 싶어 마음이 영 찜찜했다.


"어어~ 뭐라꼬? 자~ 잠깐만!"


나는 뭐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척 교실 뒤로 빠르게 걸어갔다. 뭔가를 찾는 행동을 하면서 거기 걸려 있는 거울에 내 옷과 얼굴을 급히 스캔했다. 여덟아홉 그 무렵의 아이들은 워낙 순진하고 솔직해서 어떤 한 면만 보고도 전체인 줄 아는 경우를 왕왕 봤기에 혹시라도 내 모습에서 ‘할머니스러운’ 면이 있는지 자체 검열을 한 것이다. 자기 할머니의 목에 있던 목걸이, 색깔이나 무늬가 비슷한 옷, 심지어 보글보글 파마를 보고도 "우리 할머니 같다."라며 종알종알거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 비슷한 일을 몇 번 겪어서인지 아이에게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하느라 내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음, 미안하지만 오늘은 나이를 몇 살만 줄여서 너희 할머니가 아니라 엄마뻘이라고 확실히 못박아야겠다'

대충 이렇게 나는 아이들을 싹 다 세뇌(?) 시킬 작정으로 태연하게 웃으며 하윤이에게 물었다.

  

"근데 왜에엥? 왜 내가 하윤이 할머니 같아 보영? 나 아직 젊은뎅." (아! 양심이 찔렸지만 별 수 없었다)


나는 아이의 답을 기다리며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고 아이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더라도 당황하지 않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기요, 선생님도 흰머리가 있잖아요. 우리 할머니 똑같아요!"


헉! 딱부러지는 말투, 당당한 태도, 이 시추에이션은 차라리 다행인 건가. 어야 할지 어야 할지 몹시 헷갈리는 마음을 아이는 알 리 없을 테고 그 순간에도 자기 할머니를 떠올리는 아이의 얼굴은 보름달 같았다.


‘윽! 그래도 그렇지. 흰머리 몇 가닥에 할머니라니! 이거 너무하잖아! 근데 키도 작은 애가 내 머리 꼭대기에 있는 하얀 잡초를 언제 봤대? 아니야 그래도 흰머리 때문인 게 어디야. 얼굴이 할머니란 건 아니잖아.’


발끈하는 마음 반, 위로하는 마음 반. 반반 치킨 같은 심정이 된 나는 여덟 살 아이한테 따지고 들자니 유치하고, 흰머리가 있다고 꼭 할머니인 건 아니라고 설득시키자니 한심한 마음에 그만 여덟 살 수준으로 변명해 버렸다.


"하윤아, 어제 선생님이 머리를 많이 썼나 봐. 늦게까지 일하다가 밤을 꼴딱 새웠더니 머리카락이 하얗게 질려버렸어. 우하하하! 하아하아하아~." (어색하게 작아지는 나의 웃음이라니...)


고급진(?) 나의 유머를 아이는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자기 할머니를 생각하며  얼굴에 드리웠던 광명은 이미 홀연히 사라진 뒤였다. 차라리 수업이나 하는 게 낫겠다고 여겼는지 아이의 눈은 자연스레 책상으로 향했고 아까부터 그래왔다는 듯 '갑자기' 열심히 글을 썼다. 나 역시 하던 일을 계속했지만 까닭 모를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20대 후반, 웹 개발 회사에 다니고 있던 나는 다른 부서에 있는 정현이 언니와 친하게 지냈다. 아웃소싱 업체들이 들어와 북적거리고 여직원이 별로 없는 회사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우리 둘은 늘 점심을 함께 먹고, 퇴근 후에는 술도 종종 마셨으며 가끔은 주말에도 만나서 놀았다. 돌이켜보면 그 언니는 나보다 나이가 좀 많았고 성격이 달랐으며 취향이나 스타일도 안 맞았. 그런데 딱 한 가지! 코드가 통하는 게 있었으니 바로 새치 콤플렉스였다.


햇살이 좋은 날이면 우리는 점심을 먹고 환한 창가에 나란히 앉아 주거니 받거니 새치를 뽑아주곤 했다. 그러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헤집어 흰색을 띤 한 올을 찾아내고 시선을 고정해 집게로 하나씩 하나씩 뽑아내는 건 상당한 노동이었다. 눈에 급 피로감이 몰려왔고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자니 허리도 아팠다.


언니는 늘 새치가 많았기에 대강 하다가 다 뽑았다고 해도 될 것 같았지만 내가 얼마나 정성 들여 뽑느냐에 따라 언니도 똑같이 해줄 거라 생각하니 꼼꼼하게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우리는 한참을 앉아 뽑았고 눈에 잘 띄라고 핸드폰의 까만 액정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수북이 놓인 자기 머리카락을 하얀 눈덩이처럼 둥글게 둥글게 굴린 다음 서로 마주 보며 해맑게 웃었다.


그땐 그래도 잠깐만 공들여 뽑으면 몇 달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서른, 마흔을 휙휙 넘기자 새치라고 잡아떼기도 민망 만큼 수북해졌다. 그건 더 이상 새치가 아니라 흰머리였다. 눈에 거슬린다고 깡그리 뽑으면 정수리가 휑해질 테니 뿌리염색을 시작했다. 염색 주기는 점점 짧아졌지만 고개를 숙일 때도 키 큰 사람이 나를 내려다볼 때도 아무렇지 않았고 얼굴빛은 맑게 자신 있게 찰랑찰랑 머릿결을 흔들며 돌아다닐 수 있었다.


쉰 살이 되었다. 아직도 흰머리를 볼 때마다 마음의 동요를 느낀다. 매일 하얀 머리털이 촘촘하게 돋아나는 냉정한 현실을 애써 부정한다. 여러 번 상상도 해 본다. 백발이 성성한 내 모습을 말이다. 논어에서 공자가 마흔은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 불혹이라 하고 쉰 살은 하늘의 뜻을 아는 지천명이라고 했건만 나는 아직도 흰머리에 미혹되고 나이를 받아들이라는 하늘의 뜻을 모른 척한다. 아마 육십이 되어도 까맣게 염색을 하고 아이들 눈에 젊은 선생님으로 비치기를 원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다가 빼도 박도 못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되면 어떻게 하지? 아, 몰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겠다.


한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도 나는 수업을 하고 있다.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뭐 그런 말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도 아줌마이며 아이가 있는 엄마라고 말하는 순간 2학년 인호가(여기서 '남학생' 강조)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선생님! 결혼하셨어요오오?"


그날 나는 그 아이에게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했는지 자세히 묻지 않았다. 그냥 내 속 편하게 생각해 버렸다.

'어머나, 내가 아가씨로 보인다 말이지? 호호호' 이러면서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미쳤다. 그렇지만 아가씨란 시집갈 나이의 여자를 이르고, 요즘 시대에 어디 시집갈 나이가 따로 있겠는가. 안 갔으면 영원한 아가씨!)


지난주에는 수업을 끝내고 뒷정리하고 있는데 작년에 수업을 들었던 3학년 동준이가(여기서 '남학생' 또 강조) 교실을 빼꼼히 들여다보더니 씩 웃으며 한마디 했다.


"와! 선생님 갈수록 젊어지시네요!" (그래, 멀리서 봐야 조금이라도 젊어 보인다.ㅠㅠ)




득달같이 흐르는 시간을 쫓아가고 싶고 생생히 전해오는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고 싶지만 내 얼굴과 몸에는 나이가 선명히 새겨진다. 이제 나의 몸은 자연이 주는 서리가 내려앉고 옹이가 지고 껍질이 두꺼워져 나이테가 진다. 그건 흰머리요, 주름일 것이며 검버섯이기도 하고 노안이나 난청일 수도 있을 테다. 그걸 어른들은 귀신같이 알아내지만 아이들은 귀신도 아는 걸 몰라주니 나는 오늘도 그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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