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시절, 생활이 넉넉지 않았던 고로 가정에 먹구름이 끼곤 하였는데, 그럴 때면 자녀들인 우리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방안에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 그림을 그리며 이 생각 저 생각하던 차에 누군가 절대적인 존재가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절대자는 그렇게 무섭거나 권위적인 존재가 아닌 친근한 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림을 그려 보면서, "친구야 넌 누구니? 석가모니이니? 하나님이니? 예수님이니?" 이렇게 적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성경이라곤 두세 구절 알던 기독교와는 관계없었던 나로서는 혼자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엔 교련이 있는 경우 제일 등교하기 싫은 날이었는데, 어느 날 등교하며 그 미지의 막연한 절대자 같은 친근한 친구에게 혼잣말로 말했다. '친구야 오늘 교련이 들어 있는 날인데 난 교련이 싫어.' 이런 정도의 말을 했는데 학교에 도착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기묘하게도 그날 교련 훈련이 취소되고 실내 수업으로 대체되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무언가 뇌리에 남아 있을 만큼 인상을 받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당시 이 일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진 않았다.
의예과 2학년 여름,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L이가 만나자고 해서 덕수궁 앞에서 만났다. L은 문과였고 나는 이과였는데 학보사 기자로써 같이 활동한 적이 있었다. 당시 덕수궁 앞에 스테인리스로 된 아치형 지지대에 기대서 L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웃으면서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 L은 하나님 이야기하는데 웃으면서 들은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며 자기가 다니는 예배당의 대학부에 오라고 하였다. 당시 서소문에 있는 평안교회라는 곳이었다. 그곳에 갔다가 여름 수련회까지 가게 되었는데, 삼사십 명 넘게 모이던 대학부에 모인 그들에게 무언가 밝은 분위기를 느꼈다. 당시 중학교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들을 만나면 서로 가장 기쁜 표정들을 지었을 텐데, 지금까지 내가 지내오던 그 친구들과는 무언가 다른 빛 같은 환한 어떤 것을 느끼게 되었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도서 12:1)
수련회 마지막 날 촛불을 켜 놓고 잠잠한 가운데 예수님을 믿겠느냐고 내게 질문을 하였다. ‘믿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내 안에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답을 하였다. 당시 수련회 기간 동안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 많은 말들을 하였을 텐데 어떤 것도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남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 이 같은 사람들이 믿는 예수라면 나도 믿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것들을 더 고려하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답하였다. 그런데 그 날 이후 온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하늘도 아름답고 땅도 아름답고.... 내 존재가 신선하게 느껴졌고 무언가 내 눈에서는 힘이 나오는 듯하였다. 심지어 오랜만에 나를 보신 숙부님 중 한 분께서는 나의 아버지에게 내가 무언가 달라졌다고 이야기하시기 까지 하셨다. 이런 변화가 분명히 있었지만 이것이 무엇인지는 깨닫지 못하였다.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 온 날 찍은 사진
그 후 여전히 믿음이 없었고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저녁, 스터디그룹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귀가하는데, 적막한 밤길이었다. 속으로 의문이 떠올랐다. "하나님이 계시는가?" 이 의문이 떠오르자마자 갑자기 개가 크게 짖어댔다. 뭐 그러려니 했고 개도 조용해져서 계속 걷다가 다시 똑같은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나님이 계시는가?" 그러자 또 즉시 개가 짖기 시작하였다. 이번엔 좀 느낌이 있었다. 이내 조용해지고 적막한 밤길로 돌아왔다. 세 번째로 또 그 의문이 떠올랐다. 신기하게도 이 의문이 생각 속에 떠오르자마자 즉시 또 개가 크게 짖는 것이었다. 이번에 너무 무섭고 엄중한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 이런 의문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없어 집을 향해 뛰다시피 황급히 발길을 재촉하였다.
주일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L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기들의 주일 예배에 참석하라는 권면이었다. 상황을 봐서 가겠노라 답하고 집에서 카드를 잘 섞은 다음 7번째 뒤집힌 카드에서 스페이드 에이스가 나오면 가겠다고 속으로 마음먹었다. 이 말은 가기가 내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52장으로 구성된 카드를 섞어 놓고 순서대로 뒤집어 7번째 스페이드 에이스가 나올 확률은 매우 희박할 것임이므로. 그런데 7번째 카드를 뒤집는 순간, 지난번 세 번째 의문을 가졌을 때 같은 엄중한 두려움이랄까 경외감이랄까, 어떤 더 이상 이런 식의 행동을 하면 안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스페이드 에이스가 나온 것이었다.
나중에 성경에 "그대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시험하지 마십시오"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 이후 나는 하나님이 계심을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그분은 당신과 내가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며 서로의 실존을 느끼는 것 이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