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죽을 만큼 괴로운 순간에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by 타조

당신이 아직 본 적 없는 커다란 슬픔이 당신 앞에 느닷없이 나타나더라도, 어떤 불안이 빛이나 그림자처럼 당신의 두 손과 당신의 모든 행위 위로 지나가더라도 당신은 놀라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그 무엇이 당신에게서 일어나고 있다. 인생이 당신을 잊지는 않는다. 인생이 당신을 손 안에서 떠받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생이 당신을 떨어뜨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라이너 마리아 릴케




생명의 유지나 종족의 보존, 번식 등의 생물학적 본능으로부터 자유로운 생물이 지구상에 존재할까? 단언컨대 그런 생물은 있을 수 없다.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작은 세포에도 역시 생명의 유지와 보존, 번식의 본능이 새겨져 있다. 그런 본능으로 새겨진 수많은 세포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를 이루고 있으니, 생물학적 본능을 따르지 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인간은 세포에 새겨진 생물적 본능과 구분되는 이성의 정신세계를 가졌다. 정신세계가 원래부터 인류에게 주어진 축복인지, 아니면 이조차 생존을 위한 노력의 결과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사랑이나 도덕, 명예와 같은 정신적 가치를 지키며 육체의 한계에 정면으로 맞선다. 그것은 고결한 가치를 위한 굳건한 의지이자 생명과도 맞바꿀 수 있는 정신의 도약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삶은 고통이라고. 그는 축복과도 같은 정신세계가 오히려 생명의 유지와 번식이라는 욕구를 넘어, 채워지지 않는, 또는 채울 수 없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그로 인해 고통이 발생한다고 본다. 아무리 이성의 힘을 날카롭고 뾰족하게 다듬는다 하더라도 본능과 감정을 완전히 잘라 도려내거나 찍어 누를 수는 없다. 고통의 순간은 여지없이 불쑥 찾아온다.


붉게 타오르는 아름다운 노을을 홀로 감상하며 잊지 못하는 옛 연인을 떠올린다. 따뜻한 손을 맞잡고 행복으로 반짝이는 눈빛을 나누고, 결코 잊지 못할 향기로 가득한 꽃의 언어로 서로를 감싸며 함께 바라보던 노을이 불현듯 떠올라 괴로움에 휩싸인다. 홀연 바람결에 흩어진 연기와 같은 환영을 노을 속에서 좇는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대접받고 남 부럽지 않던 전성기를 누렸으나 급작스럽게 맞이한 위기에 속절없이 무너져 곱던 손이 거칠어지고 풍족했던 삶이 남루해져 지치고 늙어 어려운 삶에 처했을 때, 풍요롭고 아름답던 과거를 되돌아보며 오열한다. 과거의 영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괴로움을 술로 쫓는다.


우리의 정신이 극심한 고통에 휩싸여 팽팽하던 긴장감이 극에 달하면 가장 은밀하고 단단하게 연결된 구조가 붕괴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하지만 릴케는 말한다. 우리가 절망의 절벽에 마지막 걸음까지 도달하였다 하더라도 분명히 지금의 고통 때문에 보이지 않는 자기 삶의 아름다움과 행복, 소중한 사람과 기억, 인생 그 자체가 모두 부정되진 않는다고. 오래 살길 잘했다는 말처럼 따뜻한 삶이 손 내밀고 있다고 말이다.


Rilke-1906.jpg

<라이너 마리아 릴케, 1875-1926>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03화고통은 고독을 낳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