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을 다하는 삶
사람이 젊어서 시를 쓰게 되면,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와 감미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아주 마지막에 열 줄의 성공한 시행을 쓸 수 있을 거다. 시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사실 감정은 일찍부터 가질 수 있는 거다), 경험이기 때문이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수많은 도시들, 사람들, 그리고 사물들을 보아야만 한다. 동물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새들이 어떻게 나는지 느껴야 하며, 작은 꽃들이 아침에 피어날 때의 몸짓을 알아야 한다. 시인은 돌이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알지 못하는 지역의 길, 뜻밖의 만남, 오랫동안 다가오는 것을 지켜본 이별, 아직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유년 시절에 우리를 기쁘게 해주려 한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서 기분을 언짢게 해 드린 부모님(다른 사람이라면 기뻐했을 텐데), 심각하고 커다란 변화로 인해 이상하게도 기억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질병, 조용하고도 한적한 방에서 보낸 나날들, 바닷가에서의 아침, 그리고 바다 그 자체, 곳곳의 바다들, 하늘 높이 소리 내며 모든 별들과 더불어 흩날려 간 여행의 밤들! 이 모든 것을 돌이켜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하나같이 다른, 사랑을 주고받는 수많은 밤들, 진통하는 임산부의 외침, 가벼운 흰옷을 입고 잠을 자는 동안 자궁이 닫혀 가는 임산부들에 대한 추억도 있어야 한다. 또 임종하는 사람의 곁에도 있어봐야 하고, 창문이 열리고 간헐적으로 외부의 소음이 들려오는 방에서 시체 옆에도 앉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추억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추억이 많으면 그것을 잊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추억이 다시 살아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큰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추억 그 자체만으로는 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추억이 우리들의 몸속에서 피가 되고, 시선과 몸짓이 되고, 이름도 없이 우리들 자신과 구별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몹시 드문 시간에 시의 첫마디가 그 추억 가운데에서 머리를 들고 일어서 나오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말테의 수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
완벽한 문구의 시를 쓰고 싶은 릴케의 마음이 담긴 글을 읽으면 릴케의 정열적인 삶이 떠오른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열망이 세상의 모든 경험과 지식에 대한 갈증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삶에서 이루어지는 작은 경험조차도 릴케에게는 해갈의 생명수였다.
도대체 시가 무엇이길래, 시를 위해 경험과 지식을 쌓아야 한다는 주객전도를 말했을까? 어쩌면 릴케는 인생의 완성이 곧 시라고 여긴 것 같다. 열 줄의 성공적인 시행을 쓰기 위해 모든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결국 인생의 종점에서나 가능할 일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인생의 정수를 담은 성공적인 시행이 갖는 의미가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완벽한 글에 대한 그의 열망에서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자기 삶의 큰 목표뿐만 아니라 옷을 정리하거나 방을 청소하고, 길에서 마주친 사람과 눈인사를 나누는 것과 같은 사소한 부분까지도 꽤나 정성스럽게 실행하지 않았을까? 아주 작은 부분까지 정성스러운 사람은 소중한 인간관계와 사랑, 책임감을 요하는 일 등 더욱 큰 부분까지 당연히 최선을 다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릴케의 삶이 그랬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릴케의 글을 읽고 삶의 작은 부분도 정성을 다해 소중하게 살아가자는 의미를 부여한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독자의 해석이 작가의 의도와 부분적으로 일치하지 않더라도 상관없다는 믿음이 있다. 물론 해석이 세상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작은 경험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삶에 보탬이 되면 되었지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성취와 성공과 같은 높은 목표를 위해 파편처럼 여기던 삶의 작은 부분이 실상은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내 삶의 작은 부분이라고 대충 지나친 일상의 순간, 책상을 정리하거나 물건을 반듯하게 정돈하는 일 따위의 작은 부분들에도 정성을 보태고자 한다. 그리고 이런 삶에 동행할 수 있는 정성스러운 사람이 곁에 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서로를 응원하고 더욱 풍성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로서 말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1875-1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