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날이 서는 이유

자꾸 긁힌다면 내게도 이유가 있을 터

by 기역
긁?

-2024년 인터넷 상의 유행어-


올해 유튜브나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많이 보였던 말 중에 '긁혔냐'는 말이 있었다.

긁혔냐는 말도 길었는지 어느새 '긁'이라는 한 글자로 줄어들었다.

그 말속에는 '고작 이런 걸로 화낼 거야?', '장난일 뿐인데 의연하게 못 넘기네?'라는 의미가 담긴 듯했다.


대개는 유명인을 상대로 네티즌이 장난을 치거나 조롱할 때 쓰는 식이었다.

하지만 사실 유명인에게만 긁히는 지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저마다 차이가 있을 뿐, 긁히는 지점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긁힌다는 표현으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떤 말은 누군가를 안 좋은 기억 속으로 데려다 놓는다.

몇 주 전의 일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 겪은 안 좋은 기억을 엄마가 농담하듯 식탁에 꺼내놓았다.

그 자리는 나와 엄마만 있던 자리가 아니었다.

동생의 아내를 겨우 세 번째 보는 자리였고 나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내가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웃음거리의 제물이 됐다.

끔찍했다.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다시는 그 공간에 가고 싶지도, 이제 같이 자리를 하고 싶지도 않아 졌다.

엄마는 아무런 의도가 없이 그냥 한 말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망신을 당한 기분을 느꼈다.

의도는 중요치 않다. 이미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나에게 있어 그 일은 깨달음을 주었다.

내가 가장 믿고 있던 가족조차도 내 상처에 무신경하다는 깨달음을.


나는 의연하지 못하다.

긁혔다는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상처와 배신감을 느꼈다.

긁힌 정도라면 밴드를 붙이면 되지만, 이건 밴드로 안 되는 상처였다.

그것의 정체는 모욕감과 열등감이 뒤엉킨 분노였다.

누군가는 옛날 옛적 몇십 년 전 일을 말한 걸로 그렇게까지 반응하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입으로 내가 병신이었다고 이야기하는 것, 날 병신이라 생각했던 애가 나보고 쟤 병신이었다고 하는 것은 넘어갈 수 있지만 내가 믿었던 사람이 나를 잘 모르는 사람 앞에서 얘는 병신이었다고 말하는 건 나로서는 참기 힘든 것이었다.


@grim_giyeok



내 인생에 확신이 없을 때는 사소한 것들에도 날이 곤두선다.

애초에 나를 화나게 했던 그 일은 다른 사람이 뭐라 하건 사소하지 않다.

그렇지만 인정해야 할 부분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지금 내 모습이 내 마음에 영 들지 않기 때문에 나는 더 화가 난 것이다.

나의 초점이 미래를 조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일도 '스쳐도 치명타'처럼 자꾸 나를 긁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내 맘에 들지 않기 때문에 화가 많아지는 것이다.


'날'을 세우는 건 피하고 싶은 게 많기 때문이다.

싫은 것들을 제거하거나 피해야 나를 지킬 수 있는 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을 세우는 건 '나'를 지키는 게 아니다.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으면 나 자신도 싫어하고 남도 싫어하게 될 뿐이다.


기를 쓰고 나를 사랑해 내야 다른 사람의 마음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사소한 것들을 사소하게 대할 수 있으려면,

사소하지 않다 하더라도 관용으로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으려면

결국은 나 스스로를 세우는 것만이 답이다.



*아모르파티(Amor Fati)로 가는 열 번째 마음가짐

자꾸 긁히는 것은 현재의 내가 싫기 때문이었다. 날이 아니라 나를 세우자.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D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글쓴이/그린이: 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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