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몸으로 하는 취미
TV를 보면 화려하거나 섹시한 가수보다는 분위기있는 배우들을 좋아한다. 여배우들을 보면 힘을 주거나 많이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존재감과 깊이가 느껴진다.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모습을 보면 우아해보인다.
운동을 찾다 발레가 생각났다. 어렸을 때 부모님을 졸라서 잠깐 발레를 배우다 토슈즈를 신기 직전에 그만뒀는데, 꼭 한번은 토슈즈를 신어보고 싶었다. 발레복과 샤스커트, 토슈즈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그 무렵 발레공연을 봤는데, 발레리나의 우아한 선에 마음을 뺏겨서 발레를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첫 발레수업, 발레복을 입으면서 너무 설렜다. 금방이라도 가녀린 몸짓으로 사방을 사풀사풀 날아다닐 것 같았다. 하지만 수업을 시작해보니 상상과 달랐다. 발레수업은 아기자기하고 부드러울 거라고 예상했지만, 굉장히 체계적었다. 정해진 틀에 따라 정확한 자세를 요구했다. 정해진 5개 기본동작을 집중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헬스장에서의 운동과 비슷했다. 몸을 크고 거칠게 움직이는 헬스와 달리 미묘한 팔의 각도나 발의 위치에 따라서 동작의 느낌이 달랐다. 단순한 동작처럼 보였지만 어려웠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면서 땀이 났다. 큰 움직임이 없었는데도 발레수업 후에는 며칠동안 근육통을 겪었다.
본격적인 발레 동작은 발레를 시작한 지 몇 달 후에 배웠다. 몇 초 남짓한 짧은 동작이었지만 동작을 연습하는 것만으로 드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발레리나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익숙한 클래식 음악에 맞춰서 움직일 때면 내가 아름다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새털처럼 가벼운 내 마음과 달리 거울 속 내 모습은 쇳덩어리처럼 둔탁하고 무거웠다. 몸을 가볍게 쓰기 위해 노력하면서 무용수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절제된 움직임은 시간과 노력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었다.
예상과 다른 딱딱한 수업분위기가 어색했지만, 발레를 배우면서 차근차근 동작을 완성해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나는 평소에 자유분방하고 몸을 크게 썼지만, 그럼에도 발레가 좋았다. 세세한 디테일을 완성하는 재미가 있었다.
발레를 하면서 몸의 코어가 차츰 잡혔다. 헬스가 몸의 큰 근육들을 잡아주는 반면, 발레는 몸의 중심을 잡아주는 속근육을 얇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발레리나들의 움직임에 고고함이 느껴졌던 것은 코어근육, 중심이 탄탄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발레운동은 모든 무용의 기본이 되는 고전이었다. 발레로 몸의 중심을 잡는 법을 훈련했던 것이 나중에 방송 댄스나 살사를 배우는데 도움이 되었다.
발레를 하면서 몸의 선들이 조금씩 얇아졌다. 특히 턱선과 어깨라인, 팔라인, 데콜테 라인이 예뻐졌다. 발레의 기본자세가 평상시에도 몸에 습관이 되면서, 무방비 상태에서 갑자기 사진을 찍혀도 자세가 밉지 않고 예쁘게 나왔다.
스스로 우아함을 말하긴 어렵지만, 나는 발레를 배우고 그 전보다 우아해졌다 (비록 이렇게 말하는 행위는 우아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우아한 자세를 습관으로 만든 이유도 있지만, 발레 동작을 연습하면서 우아함이라는 추상을 이해했다.
나는 말과 행동이 투박하고 서툴렀다. 한때는 매 순간 솔직한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표현이 적나라하거나 지나친 경우가 있었다. 뭐든 과하면 부작용이 많았다.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 솔직함과 격식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해서 종종 엇나갔다. 솔직함을 핑계로 상대방의 공간을 채우면 부담이나 강요가 되었고, 반대로 너무 닫으면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워서 상대방이 들어올 공간이 없었다. 발레는 유연하면서도 선을 지키는 방법을 몸으로 배우는 시간이었다.
발레를 통해 내가 배운 우아함의 실체는 균형이다. 몸통과 팔다리가 중심을 잡으면 손 다리가 덜렁거리지 않는다. 중심에 집중하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중후하고 고급스럽게 보인다. 우아함의 원칙은 움직임뿐만 아니라, 태도나 마음가짐에도 마찬가지다. 자기만의 원칙을 세우고 집중하면서 다른 것에 힘을 빼면 어떤 상황에서도 크게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대처할 수 있다. 자신만의 중심을 훈련하는 과정은 인고의 시간이지만, 드러나지 않는 내공이 되어 절제미로 승화된다.
한가지 취미에 집중하다 보면, 누군가가 삶의 비밀을 취미로 알려주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생생한 경험을 통해서 스스로 발견하는 답이 하나하나씩 쌓이면, 결정적인 순간에 인생이 조금 더 쉬워진다.
나에게 발레는 우아함과의 사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