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03:23경 눈을 뜨니 달리는 열차는 간쑤성 지우촨(酒泉)을 지나고 있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복도 창틀 옆 접이식 의자를 펴고 앉아 창틀 아래 콘센트에 코드를 꼽아 휴대폰을 충전한다.
열차가 고요 속에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모든 승객들은 침대에서 잠들어 있거나 혹은 좁은 잠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것이다.
아래층 노부부는 이른 새벽 침대에서 일어나 고개를 차창 쪽으로 돌린 채 마주 앉아 아무 말없이 차창 밖 황량한 평원을 응시하고 있다. 칠십 평생 노부부가 살아온 세월도 어쩌면 차창을 스쳐 지나는 풍경처럼 순식간에 지나쳐 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의 매 순간순간이 봉지 속에 몇 개 남지 않은 초콜릿처럼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지금껏 계획했던 일정에 어긋나지 않은 비교적 순조운 여정이라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서도 걱정하는 마음은 덜하다. 그렇지만 여정의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출행 나흘째 둔황(敦煌)으로 향하며 신경이 쓰이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기차역에서 목적지인 막고굴(莫高窟)과 월아천(月牙泉)까지의 불확실한 교통편, 섭씨 35도를 웃돈다는 일기예보 등이 자못 작은 불안을 불러일으키고 감당해 내야 된다는 각오를 다지게 한다.
03:50경 열차가 다시 출발하자 보조 배터리에 충전기를 내어주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옆구리를 모로 세운채 잠들어 있는 맞은편 침대 동행 Y가 중국어로 내뱉는 잠꼬대 두어 마디가 열차의 가쁜 숨에 묻혀 버린다. 지우촨에서 출발하여 지척인 가욕관(嘉峪关) 역에서 다시 정차할 때까지 20여 분은 잠으로 빠져들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나 보다.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반복하는 동안 열차는 옥문(玉门)을 지나고 있고 차창 밖은 여전히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황량한 대평원이 끝없이 계속된다. 열차 우측 창 밖으로는 날개가 쉼 없이 돌아가는 수 천 기의 풍력 발전기 군락이 한동안 끝없이 펼쳐진다. 황량한 평원에도 바람이 불어 저렇듯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둔황행 침대열차에서 만난 우루무치 거주 노부부
둔황으로 가는 길 철로변 풍력 발전기
열차는 07:20경 지우촨시 예속 현(县)인 과저우(瓜州)에서 승객을 태우고 내린 후 둔황까지 90km여를 조금씩 줄여갔다. 아침 아홉 시가 가까워질 무렵 둔황역에 내려 출구로 나서니 가지런히 줄지어서 승객을 기다리는 택시 승강장 모습이 열차를 타고 오는 내내 걱정했던 이동 교통편이 기우였다고 귀띔해준다. 궁금증에 시원시원 친절히 대답해 주는 젊은 기사는 한결 마음을 놓이게 한다.
수목이 무성한 녹지대와 황량한 사막이 경계를 그으며 명사산(鸣沙山) 풍경구가 시작된다. 사막 한가운데 맑고 짙푸른 옥빛 샘을 청록색 생기 발랄한 갈대 군락이 둘러싸고 있는 오아시스 월아천이 눈앞에 나타났다.
수목이 무성한 녹지대와 황량한 사막이 경계를 그으며 명사산(鸣沙山) 풍경구가 시작된다. 사막 한가운데 맑고 짙푸른 옥빛 샘을 청록색 생기 발랄한 갈대 군락이 둘러싸고 있는 오아시스 월아천이 눈앞에 나타났다.
월아천을 굽어보며 솟아 있는 명사산이 펼친 모래 능선 아래에는 낙타 타기 체험 관광객을 기다리는 수 백 마리 낙타가 무리 지어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하늘과 부드러운 경계를 긋고 있는 모래 능선 아래위에는 사람을 태운 낙타 행렬이 사선으로 가로지르며 길게 늘어서서 천천히 움직인다. 교역물자를 낙타 등에 싣고 수 천리 길을 오가던 옛 대상(隊商) 행렬을 만나러 타임머신을 타고 먼 과거 속으로 들어온 기분마저 든다.
일면 고집스러운 면도 보이는 어린 낙타들과는 달리 성숙한 낙타들은 매우 온순하고 참을성이 뛰어나다. 낙타는 한 번에 57리터의 물을 마실 수 있고, 3일간 물을 마시지 않아도 별 지장이 없고, 한 번에 500kg의 화물을 운반할 수 있다고 한다.
더군다나 짐 운반이나 승용 이외에 고기는 식용, 젖은 음료, 털은 직물 등으로 이용되고 수명도 40∼50년으로 길어 기원전 수 십 세기 이전에 일찍이 가축화되었다고 한다. 옛 농경 사회에 있어 농부들 곁을 지킨 우직한 소(牛)와도 같이 사막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였다고 하겠다.
명사산과 월아천
명사산 낙타 투어
오전 11시 반경 명사산을 뒤로하고 막고굴(莫高窟)로 향한다. 택시로 15분여 만에 막고굴 여행자센터에 도착해서 티켓팅을 후 배낭을 짐 보관소에 맡기고 입구로 들어서니 안내원이 영상실로 안내한다.
막고굴 영상 소개는 두 개의 영상실에서 각각 20여 분씩 총 40여 분에 걸쳐 진행된다. 동서 교역 요지로서의 둔황의 지리적 위치, 사막을 말 달리는 군인들, 사막 모래바람 소리와 모래에 묻힌 말 울음소리,... 족히 500여 명쯤 됨직한 관람객들로 가득 찬 첫 영상실에서는 둔황의 역사를 짧지만 강렬한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실감 나는 영상으로 조명하고 있다.
기원전 138년 한나라 사신 장건이 서역으로 출발해서 흉노족의 포위망을 뚫고 추격을 뿌리치며 이곳 둔황에 도착하며 둔황이 한족의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한무제는 대군을 파견하여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흉노를 몰아내고 기원전 111년 둔황군을 국경 초소로 삼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둔황은 중원과 서역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불교문화와 예술을 포함하여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고 한다.
막고굴은 전진(前秦, 350-394년) 때인 366년 낙준(樂僔) 스님이 처음으로 석굴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님은 명사산에서 동쪽의 싼웨이산(三危山) 봉우리에 내려앉는 황금빛 석양이 천만 존 부처님의 광명이라는 계시로 여겨 막고굴을 도량 삼아 불도를 닦고자 결심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16국, 위진남북조, 수, 당, 오대, 서하,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1000여 년 동안 석굴이 조성되었는데, 현존 석굴은 총 735개로 그중 예불 장소였던 남쪽 굴이 492개, 스님과 장인들이 거주하던 북쪽 굴이 243개라고 한다.
가족과 고향을 떠나 먼 변방으로 병사나 노역자로 징발된 민초들과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들의 생명은 초개처럼 가볍고 위태했을 터이니, 불교는 현실의 극도로 열악한 환경과 두려움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는 커다란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