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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작가 Sep 08. 2020

그 여자의 사연


한국시간으로 12월 25일, 비행기에 올랐더니 뉴욕에 같은 날 저녁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브루클린으로 달려갔고, 사촌동생 집으로 와 짐을 옮기고 나니 오후 9시였다.


늦은 시간이기도 했지만, 성탄절이기 때문에 그냥 잠들 순 없다고 생각했다. 웬만한 음식점들은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가로등 빛마저 어두워 동네마저 어두컴컴했다.


그럼에도 함께 길을 걷고 있는 사촌동생이 있어 든든했다. 어두운 골목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장바구니에 담은 맥주들 중 하나.


동네의 한 마트에 들어가 여러 종류의 맥주들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나는 맥주광이다. 그런 나에게 독특한 병 디자인의 홉을 잔뜩 넣 미국 맥주 반가웠다.


3년 전, 학과 대학에서 전공연수로 미국을 간 적이 있다. 그때도 맥주를 좋아하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때 이후로 미국 본토 맥주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신 나는 맥주를 쓸어 담았다.


맥주, 과일, 과자 등을 사고 나오면서 유일하게 문을 연 펍을 발견했다. 맥주를 고, 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뉴욕에서 내가 처음으로 결정한 일들이었다.      



택시 안에서 충분히 수다를 떨었는데도 아직 말하지 못한 게 있었다. 뉴욕에 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실 이 이야기는 이미 뉴욕으로 떠나기 전 한국에서 충분히 털어놓고 왔다. 일 핑계로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 그들에게 다 털어놨다. 털어놓으면서 그 사건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고, 충분히 분석했다. 이제는 그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감정을 배제할 수 있게 됐다. 한 문단 안으로 요약할 수 있게 됐다.


사촌동생의 경청 센스 덕분에, 이야기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났다.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안 좋은 기운이 나에게서 뻗어 나와 주변에까지 닿는다. 그런 이야기를 오래 하며, 뉴욕에서 정착 중인 사촌동생에게까지 안 좋은 기운을 퍼트리고 싶진 않았다. 짧게 끝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흔히들 퇴사하고 여행 간다. 나는 퇴사가 아닌, 해고를 당하고 여행을 왔다. 물론 그 안에는 많은 사연이 있지만, 제삼자가 보면 나는 잘린 입장이었다. 나는 퇴사 후 3일 정도 지나자, 무뎌졌는지 내 감정을 숨기고 싶었는지 장난스럽게 ‘잘렸다’고 (슬프지만) 말하고 다녔다.



그날은 유일하게 혼자 회사 문을 나선 날이었다. 다 같이 문을 열고 함께 퇴근했던 사람들이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중 몇은 내가 다른 데서도 일을 잘할 거라고, 그러니까 잘라도 된다고 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더 어처구니가 없었던 건, 그들이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대표의 입을 통해 들었던 것이다.


퇴근시간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도 어쩔 수 없었다. 대표실에서 문 열고 나가니, 그들은 이미 가고 없었다.


유일하게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날이기도 했다. 미안해 어쩔 줄 몰라하며 나를 졸졸 따라온 대표는 내게 택시비 만 원을 쥐어 줬다. 회사와 집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면 택시를 왕복해도 남는 돈이었다. 안 받으려고도 했는데 손에 이미 만 원쥐어진 지 오래였다.


'그것으로 죄책감을 퉁치고 싶은가.' 상처를 받은 병아리는 택시 안에서 눈물을 훔치며 서울 밤공기를 힘게 들이셨다.



비행기를 12시간 타고 왔지만 매우 들뜬 상태에 있었다. 장시간 비행은 나와 잘 맞다.


펍에서 나온 우리는 밥을 안 먹었음을 깨달았다. 오후 11시는 꿈나라로 가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뉴욕에서의 첫날을 잠으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자정까지 꾸역꾸역 뭔가를 먹으며 버티고 싶었다. 나는 시차 적응도 참 잘하는 편이다.


멕시코 음식점에서 떠먹는 타코 2개, 나쵸를 주문했다. 음식 양이 엄청 많았다. 맥주도 2병 마다.


멕시코 음식을 먹으면서 사촌동생의 근황에 집중했다. 뉴욕과 뉴저지를 왔다 갔다 하면서 혼자 이삿짐을 다 옮겨왔고, 일자리를 구했으며 비싼 브루클린 집값을 내고 살고 있는 그가 기특했다. 멋져 보이기까지 했다.

 

아니, 그는 멋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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