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촤~ 한잔하시죠. 이현우입니다.' 매일 아침 9시 라디오를 켠다. 라디오에서 이현우의 음악 앨범을 들으며 커피를 한잔한다. 따뜻한 목소리를 들으며 분주한 아침에 여유를 찾는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감미로운 가요와 팝송들이 나의 마음을 울린다. 아이들의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와도 내가 사랑하는 라디오를 켠다.
내 삶은 음악과 함께 했다. 잔잔한 클래식은 관심이 없었고 최신가요, 팝송, 라디오 등 가리지 않고 들었다. 고등학교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워크맨을 귀에 꽂고 가요와 팝송을 매일같이 들었다. 입시 미술학원 다닐 때는 라디오를 항상 켜놓으며 그림을 그렸다. 그 즈음 ‘쿨’이 데뷔를 해서 이재훈 목소리에 빠져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쿨 노래를 들었다. 20대 시절 호주에서 1년 정도 있을 때는 록 음악에 빠졌다. 록 페스티벌에 가서 헤드뱅잉도 하며 음악의 끝을 맛보았다. 한국에 와서도 미국의 유명 밴드들의 내한 공연을 쫒아 다녔다. 생긴 것 같지 않게 음악으로 노는 열정이 있었다. 음악이 없는 공간은 심심하다. 그래서 교사가 되어 학교 수업 시간에도 학생들이 그림을 그릴 때는 최신가요를 틀어준다. 아줌마가 최신가요를 줄줄 꿰며 학생들과 BTS의 ‘피, 땀, 눈물’을 같이 불렀다.
그러던 내가 첫째 아이는 태교를 한답시고 듣지도 않던 클래식 들었다. 오로지 아기의 정서발달을 최우선으로 두고 음악을 선택했다. 클래식만 들으면 어쩜 그리 잠이 잘 오는지 잠은 잘 잤다. 아이가 태어나고 낮에는 주야장천 동요만 틀어댔다. 어느새 CD에서 나오는 노래를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고 있었다. 아이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노래를 부르지만 나는 영혼 없이 입에서 동요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클래식도 아이 정서에 좋다고 하니 틀어주었다. 너는 피아노를 연주할 뿐이고 나는 멍할 뿐이었다.
둘째 아이는 태교로 매주 금요일 밤 11시부터 1시까지 ‘쇼미더머니’를 보았다. 그 시간이 일주일의 스트레스를 푸는 시간이었다. 무슨 클래식이더냐. 그냥 내가 듣고 싶은 거 듣고 엄마의 기분이 좋으면 뱃속 아기도 정서적으로 잘 자랄 거라 합리화했다. 신나게 들었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랩과 비트에 아기는 발로 배를 뻥뻥 차곤 했다. 엄마가 즐거운 만큼 아기도 랩음악을 좋아하나보다 생각이 들었다.
둘째가 태어나고도 아이가 둘 있는 우리 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클래식, 동요가 아니다. 오전 9시에는 어김없이 이현우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이들이 ‘곰 세 마리’를 부르든 ‘산토끼’를 부르든 나는 라디오에 집중한다. 흘러간 가요며 팝송을 따라 부르고 시답지 않은 DJ의 농담에 옅은 미소를 짓는다.
마음속이 답답할 때는 볼륨을 높여서 90년대 유행한 탑골가요를 신나게 따라 부른다. 특히 내가 제일 사랑했던 '쿨' 노래를 듣는다.
멋대로 내버려 둬! 누구도 상관없어! 지금 여기에 가득 차 있는 자기 혼자만의 관념들!
'쿨'의 찐 팬들만 아는 '루시퍼의 변명'은 나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소리를 최대한 높인다. 요리할 때, 청소할 때, 설거지할 때 최고의 노동요이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동요를, 클래식을 틀어주지 않는다고 아이들의 정서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아이들은 동요를 듣고 싶으면 알아서 자기 방에 가서 듣는다. 요즘은 아이들이 엄마의 취향을 이해해준다.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가 어디선가 흘러나오면 ‘엄마 노래다!’라고 호응해 준다. 엄마는 '곰 세 마리'보다 '루시퍼의 변명'이 흥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