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웅덩이속에서 세상과 만나는 방법
결혼 후 남편을 따라온 작은 도시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 없었습니다. 저를 위해 남편은 우리의 경제적 형편에 비해 지나치게 단정하고 안락한 집을 준비해두었습니다. 남편의 배려에 마음이 일렁이는 감동을 받았던 저는 정성을 다해 그 집을 쓸고 닦고 칠했습니다. 그렇게 뽀얗고 하얗게 가꿔진 집에서 바느질을 했습니다. 아침이면 출근하고 진흙같이 어두운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오는 남편을 기다리며 바느질을 했습니다. 반복적인 작은 행동이 저에게는 작은 위안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작은 바늘 하나로 지구를 휘감을 수 있겠다 싶을 만큼 작은 땀으로 수없이 하루를 걸어가다 보면 저녁을 만났고 그러다 보면 밤을 만났습니다.
사람도 장소도 낯선 것에 낯을 가리는 사람이라 밖을 나가는 일없이 하루하루를 꼬박꼬박 작고 익숙한 바늘과 하얀 집과 보냈습니다. 뱃속에는 작게 간지럽게 헤엄치는 첫 아이가 있었습니다. 나, 바늘, 아가는 셋이 정답게 잘 지냈습니다. 바느질하는 엄마 뱃속에서 틀림없이 순하게 손을 꼬물거렸을 아기 밤톨 같은 예쁜 아기가 어느날 작고 하얀 집에서 태어났어요.
낯선 도시에서의 생활. 마찬가지로 낯선 아기의 탄생. 저는 깨달았습니다 저는 제가 낳은 아기에게도 낯을 가리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기가 태어난 환경에 익숙해지는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엄마였어요. 나의 아기는 어제 하루종일 울었고 오늘은 더 울고 있으며 내일도 더 많이 울 예정이었어요. 오늘 아팠으면 내일 또 아플것이며 모레도 아플 예정이었구요. 내 의지대로 하루를 꾸려갈수 없다는 절망. 우울로 몸과 마음을 장악당하는 매일이 흘러갔어요.
저는 또다시 위안 삼을 무언가가 필요했지만 작은 아기는 저에게 시간을 내어주지 않았어요. 별빛 같은 눈동자로 오로지 저만 쫓았답니다. 끊임없이 엄마가 옆에 있어주길. 손끝이라도! 엄마의 티셔츠 끝이라도! 엄마의 냄새만이라도 옆에 있어달라며 울었어요. (모유를 짜서 배게에 묻혀 아기에게 안겨주고 멍하니 거실에 앉아있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혼자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나를 충전하는 방식인 저는 아기와 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상황이 힘겨웠어요. 그렇게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환경과 첫아이 육아라는 환장적인 조합이 합쳐지면 무슨일이 일어날까요?
저는 언제나 펄펄 끓는 물이 고인 웅덩이에 아기와 함께 발을 담그고 있는 것만 같았어요. 날이 갈수록 물은 탁해지고 더욱 뜨거워졌죠. 저는 아기와 단 둘이 견뎌야만 하는 육아가 힘들었어요. 그런데 감히 그 물웅덩이를 빠져나올 생각을 못하죠. 육아에 대한 저의 세계관이 꼭 그 뜨거운 물웅덩이 같았답니다. 처음 겪어보는 육아에 대한 열망으로 마음은 뜨겁지만 융통성이 없었고 지식이 부족했어요.
이렇게 귀여운 아기를 키우는 엄마의 마음이 기쁘지않다는 죄책감으로 매일 밤을 울고 아침엔 인상을 쓰고 낮과 저녁엔 무기력했어요.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11년 전의 저는 그 작은 웅덩이가 우리 아기에게 최선이 아니었음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그 뜨거운 물웅덩이의 온도를 낮추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도요. 저는 아기를 재우고 책을 읽었습니다. 가난을 처음 배운 것처럼 육아도 글로 배우고 생각을 다지고 마음으로 새겨야한다는 것. 나는 어쩌면 이렇게 모든 것에 서툰 사람일까. 경험을 해보아야만 알 수 있는 백지(혹은 백치) 같은 사람일까.
저는 엄마가 된 이후에 점점 더 저를 싫어하게 되었고 더 미워하게 되었고 저를 더 알 수 없게 되었던 것 같아요. 책을 읽는 것이 좋았던건 이렇게 나를 미워하는 마음을 조금씩 옅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나는 몰랐을뿐이구나.' '잘 몰라서 그랬으니까. 이제부터 안그러면 되는거야.' 하구요. 이런 생각들이 비가 되어 작은 웅덩이에 떨어지면 조금씩 조금씩 뜨거운 웅덩이의 온도가 내려가는것 같기도 했어요.
온전한 밤을 얻어본 적이 없어 조각난 밤사이 손가락 끝으로 꼭 붙들고 있던 책의 페이지들마다 - 손에서 묻어난 짠기와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애절한 마음이 고여 내 마음속 웅덩이와 똑같은 모양을 만들었어요. 작은 손자국들이 모이고 모여 작은 파도처럼 책이 일렁거렸습니다. 내가 이해하기엔 너무나 복잡하고 여리고 작은 아기와 낮동안 함께 지내며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는 제 마음처럼요.
엄마와 대화하는 아가의 눈빛이 언제나 멍하고 꿈꾸는 것 같은 이유가 무언지.
한번 울음을 터트리면 도무지 멈추지 못하는 이유가 무언지.
작은 자극에도 왜 자꾸 소스라치게 놀라는지.
제가 궁금한 것들에 대해 알게 되면 그 작은 웅덩이를 박차고 나올 수 있을 것만 같아 책을 읽고 마음에 와닿는 문장들을 기록하는 것을 반복했어요. 마치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요. 아가에게 익숙해지고 아가를 능숙하고 돌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알면. 알고 나면 무언가 달라질 것만 같다는 간절한 마음. 뜨거운 웅덩이속에서 불안을 발견했습니다
공부를 하며 알게되었던 것 중 하나인데요. 우리 모두는 불안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해요. 각자 타고난 양은 다르지만요. 그 불안을 조절할 수 있는 건. 그 불안의 정체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를 이룬 가장 작은 세포마저 닮았을것 같은 나의 아기. 그러나 한편으론 너무나 낯선 나의 아이라는 존재에게 저는 큰 불안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불안의 기저에는 분명 사랑도 있었다는 것. 낯선 이 생명을 잘 키워내고 싶다는 열망도 있다는것 역시 책으로 배웠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사랑은 조금씩 천천히 또렷해지는 무엇이라는걸요.
서툰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가다 보니 마법같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는 일은 드물었어요. 손이 닿아야 해결이 되고 때로는 물이 닿고 쓰라리고 짓무르면 여물기 위해 맞는 약을 찾고 바르고 딱지가 지고 떨어지고 때때로 흉까지 남죠. 아무것도 모르고 책을 읽던 아기 엄마는 이제 책을 읽기 위해 온전한 밤 시간보다 새벽시간을 덜어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루 중 새벽시간을 가져와 나를 키우는데 씁니다. 육아에 서툴렀던 만큼 나를 키우는데도 서툴지만 말이죠. 그 서투름이 나를 키우는 가장 큰 자원이니까 이제 부끄럽지 않습니다.
서툴다는 것이 자원이 되었다는걸 증명해볼까요? 제가 회사에서 제일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지금은 잘 못하지만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또는 '느리지만 기다려주시면 해보겠습니다.' 거든요. 대부분은 기다려주시고 노력해서 무언가를 이뤄간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표현을 해주신답니다. 마법처럼 나아지는 일은 없지만 작은 점을 이어 선으로 만들다 보면 제법 그럴싸한 그림이 한 점씩 완성되는 게 삶이라는 것도 책을 읽으며 배웠거든요. 그리고 그런 경험들이야 말로 정말 내 세상을 넓혔습니다. 마법이 있다면 이렇게 천천히 일어나는 일인가봅니다.
저는 여전히 좁고 때때로 뜨거운 웅덩이에 머무릅니다. 새벽 다섯 시. 따끈한 이불속 뽀얗고 쫀득거리는 찹쌀떡 같은 볼들이 새근새근 제 곁에서 잠들어 있어요. 조심조심 아가들 볼을 떼고 팔다리를 정돈해 다시 눕혀주고 두 손을 비벼 좋은 기운이 담긴 손바닥을 아이들 이마에 대어줍니다. 그리고 몸에 새겨진 습관대로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어요. 뜨거운 웅덩이에는 이렇게 비를 내리게 한답니다. 웅덩이를 벗어나는것이 정답이 아니라는걸 이제 알기 때문이에요. 마음속 웅덩이(불안)을 인정하고 돌보는 일이 아이를 키우는 일임과 동시에 나자신을 키워내는 일이니까요.
나를 많이 울게도 웃게도 했던 작고 낯설지만 사랑스러웠던 존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