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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e사공사칠 Sep 15. 2023

네 번째 손가락

무명지의 저력

한 손에는 다섯 손가락이 있다. 한국말로는 엄지, 검지, 중지, 약지, 그리고 소지라고 한다. 이 중 약지, 즉, 네 번째 손가락은 나머지 넷과 비교할 때 가장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손가락이라 이름이 없다 하여 무명지라 불리기도 한다. 인간은 최고를 의미할 때 엄지를, 방향을 가리킬 땐 검지를 편다. 중지는 상대방에게 욕을 하기 위해 쓰이고 가끔 소지를 들어 효과를 높이기도 한다. 반면 무명지는 쉽게 그 쓸모가 생각나지 않는다. 영어 표현 ring finger에서 알 수 있듯 아무 기능도 안 하기 때문에 반지를 끼우기에 제격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축구를 하다 크게 다쳐 오른손 중지와 무명지가 부러졌다. 두 달 정도 입원할 정도로 심각한 골절이었는데 의사 선생님의 말이 더욱 씁쓸했다. 엄지나 검지가 다쳤으면 군 복무에 지장이 있어 군대를 안 갈 수도 있다고 있으나 3, 4번이 다쳤기에 군 복무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라 하였다. 어린 마음에 군대에 대한 공포감을 가지고 있던 나로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 웃픈 기억은 힙합 전사를 꿈꾸던 고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외국 힙합 믹스테이프 속 래퍼들은 중지를 올려 세상에 엿을 먹이는 듯함 제스처를 많이 취하고 있었다. 나 또한 그들의 반항아적 기질에 반해 카메라를 향해 중지를 올렸으나 따라오는 무명지 때문에 내릴 수밖에 없었다. 수술로 인해 중지와 무명지의 신경이 붙어버려 내 오른손은 중지를 올리면 무명지가 따라오는 기이한 손이 되었다. 정말 아무 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친구다.


이렇게 천대받던 무명지도 빛을 발하는 몇몇 순간이 있으니 그의 손이 거문고, 해금 등 전통 악기를 탔을 때이다. 거문고의 가장 가느다란 줄을 유현이라 한다. 절절하면서도 곡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빛을 발하는 현이다. 유현에 닿는 손가락이 바로 왼손 무명지다. 오른손의 후광에 가리어진 왼손, 그중에서도 가장 쓸모없는 손가락이라 반지조차 끼워주지 않던 그 손가락이 거문고 연주의 결정적인 순간 주인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가끔 스스로가 무명지라 느낄 때가 있다. 사회의 여러 파트에서 제 기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다 보면 세상에 음악인이 필요한가 싶다. 위대한 기술의 개발자나 멋진 옷을 디자인하는 사람들 앞에서 음악인은 가끔 베짱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가끔은 무명지 인생을 위로하는 밥 딜런의 가사가 반전 운동을 이끌어내고 밥 말리의 노래가 옆 사람과 친해지게 만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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