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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랑스런 후후작가 Jun 19. 2024

안경빨 미친 과학자 탄생

행복한 갱년기

   1년 전부터였을까?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다가 텔레비전을 볼 때 나오는 자막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집 오래된 티브이가 작아서 그렇겠거니 하고 애써 외면했다. 어느 순간 텔레비전보다 100배, 아니 1000배는 더 큰 극장에서도 자막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우리 집 티브이 사이즈의 문제가 아니구나. 16년 전 최신식 기술이고 각막이 얇은 초고도근시의 희망같이 광고하며 혜성처럼 나타난 안내렌즈삽입술을 받았었다. 십수 년간 썼던 전교 1등 뺑뺑이 안경을 벗어던질 수만 있다면 금액도 상관없다며 그 당시 500만 원 거금을 주고 시력 교정을 했었다. 디옵터 8~9여서 각막을 많이 깎아야 하는데 내 각막 두께가 충분하지 않다고 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소중한 눈인데 너무 쉽게 결정 내렸던 것이다. 당시 수술 전 검사에서 나의 각막내피세포는 3500대 정도로 매우 많은 편이었다. 문제의 각막내피세포가 줄어들 수 있다는 부작용 따위는 단 한마디도 듣지 못하고 수술대에 올랐다는 데 있다.


  수술 후에는 정말 밝은 세상이 펼쳐졌고 오랜 시간 끼면 눈이 빠질 거 같이 이물감이 느껴졌던 하드렌즈를 끼지 않아도 돼서 만족감이 높았다. 누워서 티브이 볼 때도 안경이 없으니 편했고 수영장에 갈 때나 특히 겨울철에 실외에서 실내로 들어설 때 겪었던 안경이 뿌옇게 변하지 않아 좋았다. 그렇게 평생 난 밝은 세상에서 살 면 좋았을 텐데....


  처음에는 노안인가? 왜 이리 흐릿하지. 노안은 가까운 게 안 보인다던데 난 먼 것이 안 보이는데. 한참을 망설이다가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여서 16년 만에 안경점에 갔다. 당장 운전할 때 신호는 제대로 봐야 하기에 안경이 시급했다. 도수가 그다지 높지 않아서 안경 낀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마이너스 디옵터의 시력일 때와는 달랐기에 운전할 때와 극장에서 영화 볼 때 혹은 강의들을 때 필요할 때만 안경을 착용했다.


  강제 폐경과 함께 찾아온 갱년기가 시작되자 눈 시력이 한 단계가 아니라 3-4단계는 뚝뚝 떨어졌다. 심상치가 않았다. 렌즈삽입은 시력이 이렇게 까지 떨어지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눈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다. 그러던 중 친구의 어머니께서 렌즈삽입 부작용으로 렌즈를 제거한 것을 알게 되었다. 각막내피세포가 손상되어 각막내피세포를 이식까지 했다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각막을 이식해야 한단다. 각막이식이라.... 단순히 렌즈삽입 부작용이 생기면 렌즈를 빼면 끝나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당장 수술했던 병원에 예약을 잡고 검사를 받았다.


  수술후 1-2년은 검진을 갔었으니 마지막 검진일로부터 14년이 지난 병원의 위상은 어마어마하게 성장해 있었다. 으리으리한 빌딩에 수백 명의 직원들이 밝은 세상을 찾아온 사람들을 미소로 맞이하며 5성급 호텔처럼 럭셔리하게 변해있었다. 눈먼자들의 욕망을 영양분 삼아 무럭무럭 성장해 기업이 된 병원에서 나를 수술했던 의사는 어느덧 원장타이틀을 달았고 티브이에도 출연하며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병원에 왜 이렇게 안 오셨어요. 매년 검사받으셨어야죠."


  뭐지? 내가 의료소송이라도 걸까 봐 그런가 싶게 내 탓으로 싹 몰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매년 와야 하는지 몰랐고 시력 잘 유지되고 있어서 괜찮은지 알았어요. 별도의 정기적인 연락도 없었고요. 저 각막내피세포 심각한가요? 최근에 시력이 급격히 떨어져서 걱정돼요."

"아주 적당한 때에 오셨어요. 보통 이 정도 숫자되면 렌즈 제거 하십니다. 1500-1600대 에요."


적당한 때... 적당한 때는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한 때는 너무나 주관적인 영역이 아닌가.


"세포 이식까지는 안 해도 된다는 말씀이시죠?"

"네 여기서 몇 년 더 진행되셨으면 가능성도 있죠."


  자기 눈 아니라고 말을 너무 쉽게 해서 기분 상했다. 자기 딸이라도 저렇게 반응했을까? 상상하며 괘씸하지만 속으로 꿀꺽 삼키고 수술날짜를 잡고 진료실을 나왔다.


  렌즈 넣는데 500만 원이었는데 렌즈 빼는데 100만 원이란다. 각막내피세포 줄어든 것도 무섭고 억울한데 100만 원까지 낼 생각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차라리 수면마취하고 수술하면 무섭지는 않을 텐데 눈을 크게 벌리고 의사의 지시에 따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눈에 칼이 들어오는 모든 과정을 맨 정신으로 겪으니 끔찍했다.


"환자분 눈에 힘 빼요. 힘주면 실핏줄 터져요."


  저도 힘 빼고 싶어요. 너무 무서운 걸요. 16년 전에 수술했을 때는 안경을 벗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수술대에 올랐다면 이번에는 안경을 쓰기 위한 수술이라 착잡했다. 수술받으며 눈앞이 갑자기 빨간색이 팍 퍼지며 세상이 빨갛게 보였다가 물로 닦아내고 눈옆을 레이저로 뚫어 각막밑에 오랫동안 자리 잡았던 렌즈가 빠져나가는 것까지 전부 다 지켜봤다. 100만 원이 너무 아까웠는데 이 정도 수술이면 100만 원 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16년 만에 렌즈를 뺐더니 시력이 디옵터 10-11까지 떨어져 있었다. 이거야 말로 눈뜬장님처럼 세상이 어찌나 포근하게 뭉개져 보이던지 간호사들이 나를 부축해서 남편한테 인계해 주었다.


  강남역에서 제일 저렴한 안경점을 찾아 급한 데로 안경을 맞췄다. 기존에 갖고 있던 안경테에 알만 껴넣었다. 16년 만에 다시 초고도 근시 안경을 썼더니 눈이 콩알만 하게 작아진 느낌이 들었다. 두꺼운 렌즈 때문에 안경알 너머 얼굴라인이 왜곡되어 보이고 눈이 정말 작아 보였다. 아무도 나에게 신경 쓰지 않는데 혼자 부끄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이대로는 안될 거 같아 다시 안경점을 찾았다.


"최대한 페이스라인 왜곡이 덜 돼 보일 수 있는 안경테 있나요?"

"초고도 근시의 경우는 안경알이 작아야 해요. 그래야 안경무게도 가벼워지고 단점 보완이 됩니다."

안경사의 추천을 받아 유명 명품 안경테 st을 본뜬 짭 안경테로 결정하고 렌즈를 4배 압축해서 일주일을 기다렸다.


  내가 이렇게까지 표정관리가 안 되는 사람이었나? 안경을 피팅하는데 당혹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이건 뭐 너무 안경알이 작아서 시야가 좁아진 것은 둘째치고 인상이 너무 강해 보여 생전 처음 센 캐릭터로 변신된 기분이었다. 집에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난 지인이 요즘에는 보통 안경을 2-3개 정도 한다며 하나 더 맞출 거냐고 되물었다. 이상하다는 거다. 주말에 만난 동생이 언니 미친 과학자 같다며 노벨상 언제 받냐고 놀렸다. 이건 찐이다.




  내가 봐도 미친 과학자 같아 보여 곧 있을 학부모 총회에 쓰고 갔다가는 아무도 나한테 말도 못 걸 거 같아 마음이 급해졌다. 수소문해서 안경테를 3D프린터로 제작해 개인 얼굴 맞춤형으로 만들어주는 안경점으로 다시 찾아갔다. 수술부터 미친 과학자가 되기까지 이 모든 게 불과 2주 안에 일어난 일이다. 내 인생은 왜 이리도 스펙터클할까? 생각하며 국내 렌즈로는 내 안경도수가 커버가 안된다며 일본산 렌즈를 추천해 줬다. 추가금액을 내고 안경테는 그곳에서 가장 무난한 것으로 선택하고 3D프린터로 안경테를 맞췄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나의 목표는 바로 하나 미친 과학자로만 안 보이게 해 주세요. 비로소 정서적 안정감이 느껴졌다.





이제 사람들이 나를 미친 과학자로 보지 않겠구나 싶었다. 학부모총회에 마음 푹 놓고 가도 되겠다. 길거리를 걸을 때 왠지 모를 자신감까지 느껴졌다. 안경테가 내 얼굴 맞춤형이라 잘 어울려서 그런가 안경빨도 어느 정도 느끼며 남은 여생은 안경 낀 할머니로 남기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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