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오타의 시신을 수습하며 호성은 박영감을 떠올렸다.
그날 자신이 조금만 늦게 도착했더라도 오타는 날이 시퍼렇게 선 그 칼에 찔렸겠지. 호성은 켄타가 지시한 내용들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리며 만나야 할 사람들을 정리해 본다.
극장가에서 오타의 평은 좋지 않았다. 인력거 김씨 사건이 일어났을 땐 사람들이 왜 김씨가 죽었느냐에 대한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지만, 오타의 죽음에 대해서는 언젠가는 생길일 정도로 사람들이 받아들였다.
사실 호성도 봉순이 사건이 발생했을 땐 박영감을 말리고 싶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순사가 아니었다면 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박영감은 양복점 앞 그 사건이 발생하기 전 수없이 경찰서에 찾아와 오타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지만, 그 누구도 박영감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박영감 딸 봉순이의 평소 행실이 좋지 않았다는 둥 오타의 편을 들어주기 일쑤였다.
법을 통해 오타에게 벌을 주고 싶었지만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이미 몹쓸 짓을 당해버린 딸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했을까.
세상이 바뀌어도 여자들은 늘 약자였고, 이런 질이 나쁜 사건이 발생해도 하소연할 곳도 없이 끙끙 앓고 지나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사람들이 알아버리는 순간 자신의 혼삿길이 막힘과 동시에 세상 모두로부터 모멸과 멸시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선뜻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걸 아는 오타는 그동안 숱한 여성들을 범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일본인들의 세상. 이런 짐승 같은 놈들은 수두룩했다.
‘ 그때 그냥 냅둘걸 그랬나벼. 괜히 귀찮게 말여.’
호성은 괜히 자신이 바빠졌음이 마땅찮았는지 투덜거리며 수첩을 꺼내 삐뚤삐뚤한 글씨로 만나야 할 사람들을 적어본다.
방앗간집 박영감과 봉순이, 부인의 엉덩일 만지는 걸 보고 따지다가 도로 몰매를 맞은 정육점 정씨. 지나가는 여성들을 희롱하는 오타를 보고 참지 못해 말을 했다가 오타에게 맞고 인력거가 부서진 인력거 최씨.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타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선 시끌하게 다퉜던 사람들만을 간추려본다.
그러고 보니 인력거를 끄는 최씨는 김씨와도 손님 문제로 다툼이 잦았다.
호성은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휘적휘적 방앗간으로 걸음을 옮긴다.
“박영감님 계신감요.”
“어이 김순사 오셨는가.” 박영감이 밝게 웃으며 호성을 반겨준다.
“어찌 박영감님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먼요.” 호성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박영감에게 말을 건넨다.
“그럼 좋지~! 좋고말고! 천벌을 받아 벼락 맞고 뒤질놈이 그렇게 비명횡사했다는데 좋지 않을 리 있나. 하하하하 내가 그놈의 기름진 배에 직접 칼을 꽂지 못해 아쉬울 뿐이네.”
호탕하게 웃으며 박영감은 들고 있던 떡메를 내려놓는다. 절구에는 인절미를 만들던 중이었는지 찰진 쌀반죽이 놓여있었다. 호성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다.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시는감요. 허허허 그러면 이렇게 웃으면서 영감님하고 이야기도 못하쥬.” 호성은 절구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박영감에게 이야기를 한다.
“아이고 우리 김순사님 아직 식전이지? 내 정신 좀 보게. 일단 여기 좀 앉으시게. 봉순아 떡이랑 식혜 좀 내오너라.” 박영감은 침을 꿀꺽 삼키는 호성을 보고 급하게 봉순이를 부른다.
“최부자네가 잔치를 한다 해서 정신이 없네. 덕분에 떡은 많이 있으니 양껏 들어도 괜찮네.”
“지는 괜찮은디...”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 아닌가. 체면 차릴 것 없네. 방앗간에 딱히 대접할 것도 없고 그냥 있는대로 내놓는 거니 사양 말고 들게.”
봉순이는 윤기가 흐르는 떡과 식혜를 가져와 평상에 올려놓고는 부끄러운 듯 자리를 떠난다. 19살 건강한 처녀의 뒷모습에 호성은 시선을 떼지 못한다.
“봉순이한테도 물어볼 것이 있는디...”
“허허~ 자네가 뭐 때문에 찾아왔는지 알고 있네. 당연히 찾아올 거라 생각을 했고. 내가 그 난리를 쳤으니 당연히 나를 먼저 의심하지 않았겠나. 하지만 나는 아닐세. 아랫마을에 최부자네 잔치 떡을 만드느라 그제부터 정신이 없어. 마을 아낙들에게 물어보면 알걸세 어제도 늦은 밤까지 같이 떡을 만들었으니.”
호성은 떡을 하나 집어 우물우물 씹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 영감님이 그랬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구먼요. 이 놈이 원한에 사무쳐 사람을 죽인 놈이 아니구먼요.. 그저 재미로 사람을 죽이는 놈 같구먼요.”
“그게 무슨 소린가?”
“아.. 아니구먼요.” 호성은 떡 하나를 더 집어 먹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앉아서 더 들고 가지. 뭐 바쁜 일이라도 있나? 아니면 이 떡을 좀 싸가지고 가게. 날이 더워서 오래 두지도 못한다네. 봉순아!!! 이리와서 떡 좀 싸거라!”
박영감은 일어서는 호성을 잡으며 봉순이를 부른다.
“아이고 아니구먼요. 이러면 제가 너무 죄송스럽쥬. 허허”
봉순은 호성을 보고 얼굴이 발그레진다. 쭈뼛쭈뼛 떡을 싸서 호성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손만 내민다. 그런 봉순을 보고 있자니 호성도 괜시리 얼굴이 붉어진다.
“봉순아 이제 걱정 말고 다녀도 돼야. 사람들이 니가 잘못한 게 아닌 줄 아니까 너무 집에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나쁜 짓을 하면 저렇게 천벌을 받는거여.”
호성은 봉순을 보고 다정하게 이야기한다.
“네 순사님..” 봉순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급하게 방앗간으로 사라진다.
우물우물 떡을 씹으며 호성은 길을 걷는다.
순사생활을 한지도 벌써 5년이다. 켄타가 독립군들을 잡는 과정에 우연찮게 도움을 주게 되면서 호성은 순사보를 거쳐 순사가 되었다.
호성이 생각하는 켄타는 그렇게 나쁜 일본인은 아니었다.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는 가혹했지만, 그는 조선인과 일본인을 크게 차별하지 않았고 죄의 유무에만 집중을 했다.
고문을 통한 취조도 좋아하지 않아, 위에서 지시가 내려오면 마지못해 키무라나 호성을 통해 고문을 하게 했지만 스스로 사람들을 고문하지는 않았다.
죄가 있는 사람들만 잡아들였기 때문에 실적이 좋지 않아, 경찰 내부에서 켄타의 평은 나빴고, 결국엔 자신보다 훨씬 어린 하야시를 상관으로 두고 일을 하는 처지였다.
호성은 그런 켄타를 인간적으로 존경하고 있었다.
적어도 조선인이 몇이나 죽어 나가도 아무 관심 없다가 일본인 한 명이 죽으니 호들갑을 떠는 다른 경찰들 보다는 더 마음이 가는 것은 사실이었다.
유난히도 더운 날씨 땀을 뻘뻘 흘리며 정육점 정씨를 만나러 간다.
신분제가 없어지긴 했어도, 예전으로 치면 백정. 정씨는 사람이 조금 모자란 듯 보이고 자신의 신분 때문인지 늘 사람들 앞에 주눅이 들어있었다.
정육점 앞으로 가니 정씨는 한 참 고기 손질 중이다.
꼬챙이로 고기를 고정시키고 이리저리 뼈를 발라내고 날카로운 칼을 돌려가며 고기를 손질하는 모습은 춤을 추는 것 같다.
“정씨 날이 많이 덥쥬?”
“어! 기.김순사님 안녕하십니까?”
“안녕은 무신. 날이 더워서 고기 관리하기 힘들겄구먼.”
“요즘은 더워서 소랑 돼지는 잘 안 잡죠. 최부자네서 잔치를 연다 해서 오랜만에 돼지 한 마리 잡고 있습니다.”
“다들 최부자네 잔치 때문에 난리구먼.”
“오랜만에 하는 잔치니까요.”
“극장가에도 돼지 한 마리를 잡았다던디. 이야기 들었는감?”
호성이 슬슬 농을 던지며 정씨의 표정을 살펴본다.
“극장가에 정육점이 생겼나요?”
정씨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호성을 바라본다.
“글세... 정육점이 생긴건 아니고. 점포도 없이 자꾸만 잡네그려.”
순진한 정씨는 호성이 하는 말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정말 자신의 경쟁 정육점이 생긴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눈치다.
“점포도 없이 어떻게 소, 돼지를 잡습니까. 김순사님도 참 허허.”
“그게 그냥 돼지가 아니고. 두 발로 걷는 돼지란말여.”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양복점 오타말여. 그 자가 죽었구먼. 간밤에 누가 그 일본돼지를 잡았단말여.”
“네?? 그.. 그게 무슨...”
“정씨도 알잖여. 저번에 정씨랑도 시끌벅적했던 그 오타말여. 그나저나 요즘 고기 끊으러 오는 손님은 좀 있는겨? 날이 더워서 별로 없을거 같긴 헌디... 하긴 요새 고기 먹을 여유 있는 사람도 드물겠구먼.”
호성은 오타의 죽음을 정씨에게 알리고, 능청을 떤다.
“누. 누가 그런 짓을?”
“아이고 그걸 알면 내가 이 더운 날씨에 이렇게 돌아다니겠는감? 허허허. 고기 손질 하던거 마무리하고 있다가 잠깐 서로 와야겠구먼.” 느릿느릿 말을 하는 호성의 눈은 고기를 고정시키는 꼬챙이에 향해있다.
꼬챙이의 끝은 매우 날카롭게 갈려있어 두꺼운 고기도 쉽게 찔러 고정시킬 수 있을 듯했다.
“오늘 고기 손질을 다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텐데요.” 정육점 정씨가 머뭇머뭇 대답한다.
“그럼 먼저 서에 왔다가 손질하면 되겠구먼. 나는 인력거 최씨 좀 만나러 가야항께.켄타 경부님 알지? 서에 가서 경부님 자리로 가면 되는구먼. 모르면 순사보들한테 물어보고. 어차피 나야 켄타 경부님 시키는 대로 하는 처지니께 나는 신경 쓸 필요 없구먼. 나 먼저 가네. 준비해서 언능 가셔야 할 거구만.”
호성은 정육점을 빠져나와 극장가로 발걸음을 돌린다.
“저 꼬챙이로 사람을 찌르면 쉽게 구멍이 뚫릴라는 감...” 호성은 중얼거리며 길을 걷는다.
날이 더워 그런지 인력거꾼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최씨를 만나러 갔지만, 이미 손님을 태우고 나간터라 호성은 더위를 피하려 다방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