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숙희는 거울을 보며 쪽진 머리를 가다듬는다.
비록 사별하였으나, 혼인을 했던 몸. 지킬 정조 따위야 없다 하더라도, 단정한 쪽진 머리만큼은 숙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의식 같은 것이다.
거울을 보며 숙희가 화려하게 장식된 비녀를 꽂는다.
‘이것도 나쁘진 않네? 생긴 것과 다르게 물건 고르는 눈은 좀 있었네.’ 숙희는 인력거 김씨가 사준 화려한 비녀를 머리에 꽂으며 스스로 만족한 듯 미소를 짓는다.
김씨가 살아있을 때엔 혹시나 이 비녀를 꽂으면 김씨에게 말이 나올까 봐 차마 사용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김씨와 숙희만 아는 비밀을 혼자 간직하게 되었으니, 자유롭게 비녀를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머리를 정리하고 숙희는 길을 나선다.
한낮이 되기 전부터 푹푹 찌는 날씨다. 숙희는 부채를 펴 재빠르게 손을 놀리며 다방을 향해 걸어간다.
고갯길을 통한 지름길로 가려다, 어제 호성이 한 말이 떠올라 큰길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약국을 지나 극장가 양복점 앞사람들이 모여서 웅성웅성 거린다.
“오타상이 어제 죽었대.”
“그 돼지 오타 말이야?”
“그러게 어제 고갯길에서 칼에 맞아 죽었다는구먼.”
“칼에? 아이고 흉측해라. 벌써 몇 번째 사람이 죽어 나가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이게 무슨 일인지.”
“그놈이 여러 아낙들한테 몹쓸 짓을 하곤 했잖아. 천벌 받은게지.”
“맞아. 그 돼지 같은 놈 언젠가 큰 변을 당할 줄 알았지.”
“혹시 저번에 그 방앗간집 딸 건드린 일 때문에 그 영감이 사단 낸 거 아닐까?”
“이 사람아 생사람 잡지 말게. 설마하니 그렇게 야단법석 난리를 쳤는데 그 영감이 나 잡아가라 하고 이런 일을 벌이게? 아닐 걸세.”
“그래도 모르지. 꽃같이 애지중지 키운 딸을 그 돼지 같은 놈이...”
“어허! 이 사람! 조용 좀 하게.”
숙희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한 달 전 사건을 떠올린다.
한 달전쯤 양복점 오타상이 방앗간집 박영감 딸 봉순이를 건드려서 극장가가 발칵 뒤집힌 사건이 있었다. 방앗간 박영감은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들고 양복점에 찾아가서는 오타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오타는 서슬 퍼런 박영감의 기세에 눌려 양복점 문을 걸어 잠그고 쌓여진 옷감들 사이 몸을 숨긴 채 박영감이 떠나기를 숨죽이며 기다렸다.
아무리 불러도 오타가 나오지 않자 박영감은 양복점 앞에 세워진 가판대로 양복점 유리창을 부수기 시작했고, 곧 자신이 안에 있음을 들킬 거라 걱정한 오타는 양복점을 뛰쳐나와 도망을 쳤다.
뚱뚱한 몸으로 뒤뚱거리며 달리던 오타의 모습이 얼마나 웃기던지,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며 킥킥거렸다. 뒤뚱거리며 달리던 오타는 곧 박영감에게 뒷덜미가 잡혔고, 딸 간수를 제대로 하지 못한 건 박영감 탓이라 오히려 큰 소리를 쳤었다. 그 말에 더 흥분한 박영감은 마구 칼을 휘둘러댔고, 오타는 체면이고 뭐고 오줌을 질질 싸며 무릎을 꿇고 박영감에게 빌었다. 그럼에도 화가 풀리지 않은 박영감은 오타를 칼로 찌르려 했고 그때 호성이 나와서 박영감의 칼을 빼앗고 조용히 타일러 사건이 마무리되긴 했지만, 극장가 사람들은 그 후 박영감을 볼 때마다 피해 다니곤 했었다.
‘그 큰 덩치에 그렇게 날랜 동작이라니.’
숙희는 호성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는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나는 살아야지.’ 큰 단골이 하나 사라진 건 아쉬웠지만 그 역겨운 돼지 상을 보고 더 이상 웃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숙희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앞으로 고갯길로는 다니지 않아야겠어.’ 숙희는 어제 호성이 했던 말들을 곱씹으며 다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