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등짝을 딱! 때려주고 싶어
03 / 한 대 갈기고 한 대 더!
C역에 가면 가끔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그녀를 볼 수 있다.
단정한 옷차림. 머리도 곱게 빗었다. 배시시 웃고는 넓은 역 로비를 걷는다. 직진해서 30보, 뒤로 돌아 30보. 좌향좌해서 15보, 우향우해서 15보. 직진과 후진, 좌향좌, 우향우를 순서 바꿔 반복하다보면(가끔 순서가 틀린다) 결국은 한쪽 벽에 딱 붙어서 꼼짝을 못하는 그녀를 보게 된다.
이리저리 잘 걷던 그녀는 이제 나아갈 바를 모르고 울상이 된다. 열심히 걷기는 하지만 결국은 막다른 벽. 그런 그녀를 보면서 ‘방향’을 생각하게 된다. 제대로 된 방향. 제대로 된 사랑.
‘환상 방황’이라고도 하는 링반데룽(Ringwanderung)은 등산의 조난 용어다. 목표를 향해 제대로 걷고 있다고 하지만 결국은 한 지점을 중심으로 뱅뱅 도는 형상을 말한다. 짙은 안개, 폭풍우 혹은 캄캄한 밤중에 이런 현상을 겪는 경우가 많다. 걷기는 열심히 걷되 아무리 걸어가도 목표물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결국엔 공포감에 질려 공항 상태에 빠지거나 기진해서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우리 애기 때문에 이를 어쩌나, 이를 어째.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우리 애기를.”
상담 전화를 통해 들려오는 나이가 든 여자 목소리. 안절부절. 다급함이 뚝뚝 묻어난다. 애기라면 손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말씀해보세요. 애기가 어떻게 됐어요?”
“글쎄, 우리 애기가, 아유 이걸 어째. 이걸 어떻게 하냐고요.”
발만 동동 구른다. 뭐가 얼마나 급한지 모르지만 덩달아 조급해진다. 이런 때일수록 냉정하게 대처하는 게 좋다. 일부러 느린 말투로 질문한다. 한참 만에 겨우 말문을 연다.
“글쎄, 우리 애기가 알로티씨(ROTC)인데 시험을 못 봤대요.”
“아기가 알오티씨?”
“예. 알오티씨. 조금 전에 우리 애기가 전화를 했는데 시험을 못 봐서 점수가 안 나왔대요. 점수가 안 나오면 수료를 못하고, 수료를 못하면 장교로 갈 수 없대요. 아유, 우리 애기가 그렇게 되면 어떻게, 어떡하냐고요. 우리 애기가 지금 엉엉 울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면서. 선생님,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게 좋아요? 그걸 몰라서 전화했어요.”
애고 엄마고 등짝을 있는 힘껏 갈겼으면 시원하겠다. 그러나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두서없는 말로 두루 뭉실 위로해주고 말았다. 애를 탓할 것도 없고 늙은 엄마를 탓할 것도 없다. 사랑의 방향, 생각의 방향을 잃은 사람들에겐 대책이 없다.
그나저나 ‘아기’가 장교로 임관했는지 모르겠다만 군대 생활을 어찌할 거며, 그 아래 장병들은 또 어떻게 될지... 엄마는 군부대 옆에 숙소를 잡아놓고 매 시간 전화하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