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_2. 꿈의 바닷길
그는 어느 숲길을 걷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천의 숲길도, 떠나온 고향 마을 숲길도 아니었다. 얼마 전 다녀온 왜국의 숲길도 아니었다. 그러면 이곳은 어디인가. 천왕은 낯선 두려움과 설렘 속에 길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다. 숲 안쪽에서 꽃향기가 풍겨 나왔다.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고, 이름 모를 꽃과 나무가 빼곡했다. 냇물은 맑디맑았고, 물속에는 형형색색의 물고기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헤엄쳤다. 나무에 달린 열매에서는 단내가 풍겼다. 천왕은 색이 노랗고, 가지처럼 길쭉한 한 다발의 열매를 발견했다.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따 껍질을 벗겼다. 연두부처럼 말랑한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그는 망설임 없이 한입을 베어 물었다. 상큼하고, 달큼했다. 처음 먹어본 맛이었다.
‘세상에! 이런 열매가 있었나.’ 천왕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신비롭고 황홀한 맛에 반한 천왕은 남은 열매를 배낭에 주섬주섬 집어넣었다. ‘월이랑 성이랑 맛보면 깜짝 놀라겠지’라고 혼잣말하면서. 그는 좀 더 깊숙이 들어가 보기로 했다. 미지의 세계로 떠난 여행자 같았다.
가장 우거진 숲에 이르렀을 때, 그의 눈앞에 커다란 강이 나타났다. 배를 타고 건너지 않으면 건널 수 없을 정도로 드넓었다. 그때, 별안간 배 한 척이 떠내려왔다. 사공도 없이 내려온 배는 그의 발 앞에 다다라 멈췄다. 천왕은 냉큼 배에 올라탔다. 배는 스스로 움직였고, 잔잔한 물결을 가르며 반대편으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하마터면 물에 빠질 뻔했다. 천왕은 배 난간을 힘껏 잡고 버텼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면서. 하지만 이미 올라탄 배에서 내릴 순 없었다. 저 멀리 집채만 한 크기의 무리가 등에서 물줄기를 뿜어내며 펄떡거렸다. 고래였다. 수십 마리가 장엄한 동작으로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주변에는 물보라가 파도처럼 일었다.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어 수면 위를 뛰어오르는 군무. 멀리서 보니 마치 하늘을 나는 듯했다. 물과 하늘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천왕은 고래 떼 향연에 넋을 잃고 말았다.
고래들이 이동한 방향으로 섬 하나가 흐릿하게 보였다. 천왕은 오른손을 들어 눈가에 대고 거기가 어딘지 두리번거렸다. 눈은 가늘어졌고, 미간은 지그시 찌푸려 들었다. 낯선 섬이었다. 배는 섬 주변을 몇 번 빙빙 돌다 멈췄다. 배에서 내린 그는 섬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섬 안쪽에서 강 쪽으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천왕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컴컴해졌다. 순식간에 먹장구름이 몰려들었다. 번개가 섬광처럼 번쩍였다. 잠시 뒤 천둥과 벼락이 치며 장대비가 쏟아졌다. 천왕은 비를 피하고 싶었지만, 근처에는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다. 섬 뒤쪽에서는 거센 불길이 솟았다. ‘펑’하고 폭탄이 터지는 소리를 내면서. 시뻘건 불길은 하늘을 향해 맹렬히 솟구쳤다. 불길 속에는 깊은 땅속에 파묻혀 있던 돌과 나무와 바위가 섞여 날아올랐다. 화산재가 회색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었다. 천왕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커다란 불덩이가 천왕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피하고 싶었지만, 다리가 땅에 붙었는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불덩이가 눈앞까지 다가왔을 때, 천왕은 심장이 멎는 듯했다.
“으악! 안돼!” 잠에서 깬 천왕의 옷은 땀으로 흠씬 젖어 있었다. “휴, 꿈이었구나.” 천왕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자던 서 씨가 놀라 일어나 남편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요? 대체 무슨 꿈이 그리 요란하대요.” 천왕은 말없이 자리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자리에 누웠다. 한 번 깬 잠은 다시 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꿈속의 장면이 생생하게 맴돌았다. 단꿈은 기어이 악몽으로 끝났다. 얼마 뒤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천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는 밤새 내린 비바람에 솥이며 요강이며, 바가지며, 가마 도구들이 여기저기 나뒹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