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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재민 Jan 21. 2024

잃어버린 꿈을 찾아주는 흥신소

삼천리 연탄구이

천수만은 다운을 조용히 불렀다. 재단 이사장으로서 학교폭력위원회 소집과 가해 학생 징계는 당연하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 필요성도 논의했다. 수만은 재단 차원에서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지원금을 내놓겠다고 했다. 그걸 통해 전문 강사를 초청해 강의하고, 개인별 맞춤형 상담을 돕겠다는 제안을 했다. 

“프로그램 운영을 정다운 소장께서 맡아주면 어떻겠소?”

“네? 제가요?”

“정 소장께서 직접 하기 어렵다면 전문 기관에 위탁 운영을 맡겨도 됩니다. 제가 바라는 건, 정 소장께서 프로그램이 충실히 운영되고 있는지 관리 감독 역할을 해 달라는 겁니다. 학교 자체적으로 할 경우 이런저런 문제점 생겨도 쉬쉬하고 넘어갈 수 있을 테니까요.”

“무슨 말씀인 줄은 알겠습니다만...제가 그걸, 할 수 있을까요?”

“아주 잘할 겁니다. 아까 아이들에게 하는 말을 들으면서 저는 정 소장의 진정성을 느꼈거든요. 자라나는 아이들의 꿈을 지켜주는 일을 하신다면서요. 제가 한 제안이 정 소장님의 철학과도 맞을 거라고 봅니다.”

다운은 수만에게 며칠 시간을 달라고 했다. 흥신소 직원들과 상의한 다음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수만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검은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이내 수만의 옆에 있던 비서가 출입문 쪽으로 안내하며 다음 일정을 설명했다. 다운은 창문을 통해 수만이 비서와 함께 왔던 길로 돌아가는 모습을 넌지시 지켜봤다. 교장이 주차장까지 나와 수만을 배웅했고, 차가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90도로 인사했다. 수만이 탄 차는 먼지를 일으키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나갔다.      


*     


흥신소로 돌아온 다운은 달래와 쾌한에게 학교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했다. 다운의 이야기를 듣고 난 두 사람의 입이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소장님, 정말 대단한데요.”

“뭐 가요?”

“사건 해결이야 둘째치고, 큰 사업을 물어오셨잖아요? 그럼 이제 우리 사무실 월세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예요?”

달래가 잔뜩 들뜬 기분으로 물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쾌한도 다소 흥분한 기색이었다.

“그럼 두 분은 천수만 이사장 제안을 수락하자는 거죠?”

“당연하죠!”

“말이라고요.”

달래와 쾌한은 한목소리로 화답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달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천수만 이사장이 지원하는 예산은 모두 행복중 학폭 예방 활동에만 쓸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쾌한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운을 올려다봤다. 

“저희가 사사롭게 챙기는 돈은 없을 거란 말입니다. 월세를 낸다거나, 간식을 사 먹는다거나. 그 돈은 그렇게 쓰면 안 되는 거니까요. 온전히 학생들의 꿈을 위해 써야 합니다. 그게 천수만 이사장의 뜻이고 바람이니까요.”

“소장님, 그래도 저희도 먹고는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월급은 둘째치고 월세도 제대로 못 내고 있는데….”

쾌한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다운의 눈치를 본 달래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아직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월세 못 내서 당장 쫓겨날 정도는 아니고, 월급도 그 정도면 적은 편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사무장님. 우리가 지금 돈 벌자고 이 일 시작했습니까?”

돌변한 달래의 다그침에 쾌한은 짐짓 놀랐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난 그저, 그런 부분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지…. 진 주임도 참, 내가 그런 속물로 보여!”

쾌한은 당황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로 돌아갔다. 달래는 다운을 바라보고 웃으며 살짝 윙크를 보냈다. 다운은 그런 달래와 쾌한이 고맙고도 미안했다.

“자자, 사건 하나 잘 처리했으니 저녁에 회식이나 할까요?”

다운은 모처럼 사무실 건너편 사거리에 있는 연탄구이 집에 가고 싶었다. 두 사람도 잘 아는, 정다운 흥신소 단골 맛집이었다. 어느새 눈이 그쳤다. 사무실 창문만 찬바람에 간간이 떠는 소리를 냈다.     


‘삼천리 연탄구이’

세 사람은 식당 간판 바로 밑에 차려진 야외 원탁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찬바람을 가리기 위한 하얀색 천막을 쳐놓았는데, 포장마차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테이블 가운데에는 시뻘건 숯이 담긴 화로가 들어섰고, 그 위에 석쇠가 놓였다. 이윽고 한 남성이 쟁반에 갈매기살과 돼지껍데기를 담아다 석쇠 위에 차례로 올렸다. 쾌한이 불판 위에 얹은 고기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여긴 언제 와도 양이 푸짐해서 좋단 말야.”

“고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분이니 어련하시겠어요.”

달래가 농담 섞인 핀잔이 이어졌다. 쾌한은 달래의 농에 전혀 괘념치 않았다. 

“흠흠, 그나저나 소장님. 저는 이번 행복중학교 사건을 처리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쾌한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다운과 달래가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봤다.

“물질적인 수입을 얻진 못했지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좋은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 고무적이잖아요. 물론, 소장님 역할이 가장 컸지만.”

“그게 바로 저희 흥신소의 철학이자 정다운 소장님의 가치관 아니겠어요.”

쾌한의 말에 달래가 얼씨구나 화답했다.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난 다운도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제 가치관과 철학을 이해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 그런데 말입니다…” 

다운이 말을 하다 말곤 쾌한과 달래를 번갈아 바라봤다. 두 사람은 다운을 빤히 쳐다봤다. 잠시 뜸을 들이던 다운이 말을 이어갔다. 

“사실, 두 분께 말씀 드리지 못한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데요? 안 좋은 일인가요?”

“아뇨. 그 반대입니다.”

“안 좋은 일 반대는 좋은 일인데? 혹시, 소장님 로또 당첨됐어요?”

“에휴, 제가 그걸 어떻게…. 저는 학교 다닐 때 보물찾기도 못 해 봤어요.”

“그럼 좋은 일이 뭔데 그렇게 뜸을 들이세요? 답답해 죽겠으니까 어서 말씀 해 보세요.”

성격 급한 쾌한이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다운을 보챘다. 쾌한이 몸달아하는 모습을 보던 다운은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사실, 행복중학교 천수만 이사장이 교육 지원 프로그램과 별도로 매달 저희 흥신소를 후원하고 싶답니다. 저희가 하는 일을 듣곤 매력을 느꼈다지 뭡니까. 꿈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써 주면 좋겠다면서.”

“아니, 그게 정말이에요? 천수만 회장이, 아니 천수만 이사장이 그렇게 배포가 있는 분인 줄 미처 몰랐네요?”

달래가 놀랍다는 듯 입을 벌렸다.

“이건 로또 당첨보다 더 좋은 거네. 이제 그럼 우리 월급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네요? 그렇죠? 아싸!”

쾌한이 손뼉을 치며 일어나 크게 웃었다. 덩실덩실 춤이라도 한판 출 기세였다. 

달래가 주변 사람들 보니 창피하다며 겨우 주저앉혔지만, 쾌한 입가에 미소는 가실 줄 몰랐다. 다운과 달래도 쾌한을 보고 기분 좋게 웃으며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접시로 가져갔다. 

“이렇게 좋은 날 반주가 빠지면 곤란하죠?”

다운이 오른 손가락을 들어 술을 마시는 시늉을 보이자, 쾌한이 반사적으로 식당 안쪽을 향해 크게 외쳤다. 

“사장님! 여기 쏘맥이요~.”     


 


세 사람은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그동안 사무실 임대료 걱정에 회식 한 번 맘 편히 못 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다운은 쾌한과 달래에게 더 미안했다. 

“이런 자리를 자주 만들어야 하는데, 제 능력이 부족해 두 분께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희는 아무 상관 없어요. 오히려 집에 일찍 들어갈 수 있어서 더 좋아요.”

“그럼요. 저도 퇴근하자마자 집에 가서 아이들이랑 놀아주니까 애 엄마가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직원들은 다운을 격려했다. 다운은 두 사람이 하는 말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두 분 때문에 저는 오늘도 행복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자, 우리 건배합시다. 정다운 흥신소의 무궁한 발전과 이 세상 모든 이들의 소중한 꿈을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술자리는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달래는 화장실이 가고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핸드폰을 챙겨 들고 문밖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아직까진 정신이 말짱했다. 막 화장실 입구에 다다랐을 때, 그녀 앞에 웬 남성이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는 연탄불을 넣고, 고기를 가져다주고, 불판을 갈던 식당 사장이었다. 남성은 달래를 보더니 전화기를 든 채 자리를 옮겼다. 달래는 살짝 고개 숙여 목례하고 급히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용변을 마친 달래는 화장실 거울을 보고 화장을 고쳤다. 화장실 건물 뒤쪽에서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식당 주인인 듯싶었다. 달래가 화장을 고치는 내내 통화 내용이 귀에 들어왔다. 

“달래야, 아빠 일 끝나자마자 들어갈게. 조금만 기다려.”

‘달래? 나랑 딸 이름이 나랑 똑같네’ 

달래는 립스틱을 바르며 헤벌쭉 웃었다. 

“숙제는 다 했니? 내일 학교 가져갈 준비물은 다 챙겼고?”

그건 다정한 아빠의 목소리였다. 

‘엄마는 집에 없나? 왜 아빠가 그런 걸 다 챙기지?’

화장을 다 고친 달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장실을 나왔다. 그러다 통화를 마치고 식당 안으로 향하던 남자와 다시 마주쳤다. 두 사람은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다. 

“아, 손님. 미안합니다.”

“아녜요. 제가 문을 조심히 열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서로 사과를 마친 두 사람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남자는 식당 안으로, 달래는 비닐 천막이 있는 테이블로. 달래는 남자가 낯익어 보였지만, 정확히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달래는 취기가 올랐는지 고개를 흔들며 두 손으로 뺨을 톡톡 쳤다. 자리로 돌아온 달래는 다시 술자리에 합세했다. 어느새 테이블 위에는 소주병과 맥주병이 열을 맞춰 늘어섰다. 시간은 밤 10시를 넘어섰다.

“소장님, 술병이 이렇게 많은데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아니면 간만에 회식이라서 그런가, 하나도 안 취하는 거 같애요.”

쾌한이 다운의 손을 덥석 잡으며 웃었다. 그의 벌건 얼굴에 혀가 살짝 꼬부라졌다.

“안 취하긴요. 혀가 오징어구이처럼 돌돌 말려 들어가기 직전이고만.”

달래가 쾌한을 살짝 째려보며 말했다. 다운은 시간이 늦었음을 알고 술자리를 정리하려고 했다. 

“자자,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여기까지 하고 정리할까요?”

“아니, 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직 10시밖에 안 됐는데. 2차까지 가셔야죠.”

“아유 참, 우리 사무장님 오늘 정말 제대로 달리시네. 그러다 낼 아침 이불속에서 못 나와요. 소장님 말씀대로 오늘은 여기서 끝내고고 다음에 또 하시죠. 전 그게 나을 것 같아요.”

달래가 취기 어린 쾌한을 달랬다.

“에이. 그런 게 어딨어. 안 돼 안돼! 가려면 다들 가세요. 난 더 한잔 더하고 갈 테니까. 그리고 내일 정시 출근할 테니 걱정일랑 고이 접어 두시고요.”

다운과 달래는 쾌한만 혼자 두고 갈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운은 쾌한과 협상을 했다. 

“좋습니다, 사무장님. 그럼 우리 딱 소주 한 병만 더 먹고 일어나는 겁니다. 오케이?”

“안 오케이. 소주 한 병에 추가로 계란말이. 오케이?”

“콜!”

달래가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에 달린 벨을 눌렀다. 식당 종업원이 일행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달래는 종업원에게 술 한 병과 계란말이를 시켰다. 

“저, 죄송한데요. 저희 마감 시간이 다 돼서요.”

그러고 보니 식당 안에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비닐 천막 테이블에도 다운 일행 외에 아무도 없었다. 

“앗, 죄송합니다. 금방 일어날게요.”

다운이 쾌한에게 그만 가자는 눈빛을 보냈고, 쾌한 역시 할 수 없다는 듯 체념한 순간, 안에 있던 사장이 나오면서 말했다. 

“조금 더 있다가 가셔도 됩니다. 어차피 더 올 손님도 없을 것 같군요. 계란말이는 금방 되니까 기다리세요. 대신, 11시 전으로는 일어나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아이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사장님, 복 받으실 거예요.”

쾌한이 일어나 해맑게 웃으며 사장에게 폴더인사를 건넸다. 쾌한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사장도 엉겁결에 허리를 숙여 맞절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어쨌든 배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얼른 먹고 일어날게요.” 

사장은 주방으로 들어가 프라이팬에 불을 달구고 달걀을 몇 개 깨뜨려 그릇에 담았다. 그사이 종업원은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다 테이블에 가져다줬다. 다운 일행은 술자리를 마저 이어갔다. 술자리는 정확히 10시 40분에 파했다. 계산을 마친 일행은 귀가를 준비했다. 다운은 카카오 택시를 불렀고, 쾌한은 대리운전 기사를 불렀다. 달래는 함께 사는 동생이 태우러 온다고 해서 식당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럼 달래 씨 조심히 들어가요. 내일 봐요.”

쾌한은 먼저 주차장으로 이동했고, 다운도 달래에게 인사를 건넨 뒤 곧바로 도착한 택시에 올라탔다. 

“소장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래요, 달래 씨. 메리 크리스마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그리고 몇 분 뒤면 크리스마스였다. 

“네, 소장님. 메리 크리스마스!”

다운을 태운 택시는 정차 중 비상 깜박이를 끄고, 교차로 쪽으로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혼자 남은 달래는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 검색을 하며 동생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달래는 온라인 쇼핑몰에 들어가 옷을 구경했다. ‘크리스마스에 잘 어울리는 옷은 뭘까’ 하면서. 그때 사장과 종업원이 식당 정리를 마치고 나왔다. 

“아직, 안 가셨군요?”

사장이 문 앞에 서 있던 달래에게 말을 걸었다.

“네, 같이 사는 동생이 데리러 온다고 해서요. 괜히 저희 때문에 퇴근이 늦어서 어떡하죠.”

“더러 있는 일이라 괜찮습니다.” 

사장 얼굴을 정면에서 본 달래가 이제야 누군지 떠올랐다는 듯 사장을 빤히 보며 물었다.

“저기, 혹시…상철 선배?”

“누..구신지?”

“저 모르시겠어요? 달래예요, 진달래.”

“진달래? 혹시, 한국대 국문과 11학번 진달래?”

“네 맞아요, 선배. 아는 분이긴 한데, 누군지 영 떠오르지 않았는데 이렇게 보니 알아보겠네요.”

달래는 어려운 문제의 정답을 맞힌 것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기뻐했다. 

“잘 지냈어?”

사장도 반가움에 달래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보시다시피. 선배, 그런데 언제부터 여기서 일한 거예요? 사무실 근처인데 여긴 그동안 한 번도 안 와 봤는데.”

사장은 두 사람의 해후를 옆에서 멍하니 바라보던 종업원에게 먼저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종업원은 그제야 두 사람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오픈한 지는 1년 정도 됐는데, 문을 열다 말다 해서….” 

상철은 말을 얼버무렸다.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았지만 달래는 캐묻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 누구나 말하기 어려운 비밀을 하나씩 간직하고 사니까,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마침 달래와 함께 사는 나리가 도착했다. 나리는 식당 앞에 차를 세웠다. 그녀는 유리창을 반쯤 내리고 경적을 짧게 울렸다. 

“참, 엿들은 건 아닌데 아까 우연히 전화 통화하는 걸 들었어요. 딸 이름이 달래인가 봐요?”

“응? 아, 그랬니. 그래, 맞아.”

“화장실에서 누가 내 이름 부르는 줄 알고 깜짝 놀랐지 뭐예요. 어쩜 이름도 그렇게 예쁘게 지었대요? 딸내미 기다리는 것 같은데 선배도 얼른 들어가세요. 괜히 저희 때문에 마감 늦어서 죄송하고요.”

“아냐, 정말 괜찮아. 이렇게 널 만나서 기분 좋은데.”

“언니, 거기서 뭐 해? 얼른 타, 추워.”

달래는 상철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나리가 춥다며 성화를 부리는 바람에 오래 서 있지 못했다. 

“선배, 제가 조만간 연락드릴게요.”

“그래, 동생 기다린다. 어서 가봐.”

달래는 나리가 세워둔 차 쪽으로 걸어갔다. 상철은 달래가 가는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갑자기 달래가 상철 쪽으로 홱 돌아섰다. 

“선배! 메리크리스마스.”

“어? 그래, 너도 메리크리스마스.”

상철은 손을 반쯤만 올린 채 머쓱하게 달래를 봤다. 차는 달래가 조수석에 타자마자 서서히 움직였다. 그리고 쾌한과 다운을 태운 차량이 갔던 방향으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상철은 제자리에서 달래가 탄 차가 골목을 지나 교차로까지 나갈 때까지 지켜봤다. 그는 작게 혼잣말했다. “반갑다, 진달래.”     



‘삐비빅, 삐비빅.’

상철은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왔다. 집안은 조용했다. 신발을 벗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간 상철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곤 맞은편 안방 문을 살며시 열었다. 안에서는 딸 달래가 쌔근거리며 잠들어 있었고, 그 옆에는 어머니가 모로 누워 손녀를 꼭 껴안고 주무시고 계셨다. 들어오다 상점에 들러 산 크리스마스 선물을 달래 머리 맡에 내려놓았다. 올해 크리스마스 선물은 티니핑 칭찬도장 세트였다. 어머닌 고단했는지 코를 살짝 골았다.


상철은 다시 문을 조용히 닫고 나가 욕실로 향했다. 혹여 두 사람이 잠에서 깰까 물을 약하게 틀어놓고 하루의 피곤을 씻어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상철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 책상 의자 앞에 앉았다. 졸음이 몰려왔지만, 잠들기 전 마지막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상철은 잠자기 전 습관적으로 글을 쓰곤 했다. 상철은 시도 쓰고, 소설도 썼다. 해마다 그렇게 쓴 글은 책으로 내고도 남을 분량이지만, 차마 책을 낼 용기는 없었다.


출판사에 투고해 볼까 했지만, 아직 실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그래도 언젠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책을 내보는 게 그의 꿈이었다. 어쨌든 그는 하루를 마감하는 글쓰기 시간이 마냥 즐거웠다. 노트북을 펴고 앉은 상철은 얼마 전부터 쓰기 시작한 소설을 계속 이어가려고 했다.


사실, 요 며칠 글이 술술 써지지 않아 골치가 지끈거렸는데, 마침 괜찮은 소재가 떠올랐다. 그의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은 가수 지망생이었다. 각종 오디션에 참석했지만, 번번이 탈락하면서 의기소침했다. 그다음을 어떻게 끌어갈지 스토리라인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대학 후배인 진달래를 만나면서 복잡한 상황의 실타래가 한 가닥 풀린 느낌이었다.


‘그래, 그렇게 한 번 해보자!’


상철은 빙그레 웃으며 한글 파일에 한 문장, 한 문장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은 아르바이트하던 식당에서 우연히 오래전 알고 지낸 여자 주인공을 만났다. 두 사람은 가볍게 만남을 이어가다 연인으로 발전했다. 여자 주인공은 실의에 빠진 남자 주인공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 주었고, 그 덕에 남자 주인공이 용기를 내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리고 연인의 응원을 받으며 TV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으로 이어갔다. 거기까지 썼을 때, 상철은 달래를 떠올렸다.


그와 달래는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나왔다. 상철이 두 학번 위였다. 대학 시절 둘은 국문과 동아리 ‘창작 문학회’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달래는 꿈 많은 새내기 문학도였고, 상철은 말 수 없는 선배였다. 얼굴은 여자처럼 희고 고왔고, 눈빛은 우수에 찼으며, 표정에는 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던, 그래서 누구든 다가가기 어려웠던, 서정성 짙은 시를 좋아해서 ‘릴케’라는 별명이 붙었던, 그러나 달래는 첫 만남부터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가 저도 릴케를 존경한다, 먼저 말을 걸었던. 상철은 아직도 달래가 그때 자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 릴케 시 중에 ≪나의 축제를 위하여≫를 좋아해요. 그중에 ‘인생이란 꼭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그냥 내버려 두면 축제가 될 터이니’ 이 첫 문장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상철은 달래가 무척 인상 깊었다. 릴케를 좋아한다는 것부터 관심을 끌었지만, 가장 좋아하는 시와 구절마저 자신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상철은 동아리방에서 달래와 릴케 이야기를 자주 나눴다. 시와 소설부터, 쉰 살 나이에 백혈병에 걸려 스위스의 한 요양소에서 죽기까지 생애와 인생을. 특히 두 사람은 릴케가 묻힌 공동묘지 비석에 새긴 그의 시를 자주 되뇌곤 했다.    


장미오 순수한 모순욕망이렇게도 많은 뚜껑 아래에서 아무도 잠을 자지 않는다.’     


달래와 과거 기억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겼던 상철은 크게 하품하곤 노트북을 닫았다. 그만 자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여덟 살 달래를 깨워 씻기고, 밥을 먹인 뒤 유치원에 데려다줘야 했다. 어머니는 그 전에 파출부 일을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상철은 고단한 몸을 침대에 뉘었다. 웃풍이 유독 심한 방이라 이중창을 댔어도 냉기가 스멀스멀 들어왔다. 상철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달래야, 메리크리스마스.”

‘달래’는 어린 딸이었을까, 대학 후배였을까. 그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 알람 소리에 깬 상철 앞에 달래가 다가와 살포시 안겼다.

“오구, 우리 딸 일찍 깼네?”

“당연하지!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아, 그렇구나. 정달래 메리크리스마스.”

“응. 아빠도 메리크리스마스. 그리고 티니핑 선물도 고마워.”

“어젯밤에 아빠 일 끝나고 들어오는데 산타할아버지가 막 놓고 가시더라.”

“그래? 언제 만나면 고맙다고 전해줘.”

“응? 아, 그..래. 그럴게. 선물은 맘에 드니?”

“그럼 그럼, 아주 대단히. 산타할아버지가 고생해서 번 돈으로 사 준 건데. 고맙지.”

상철은 달래의 말에 깜짝 놀랐다. 요즘 아이들은 산타의 존재를 너무나 일찍 알아버리는 사실에 살짝 서글퍼지면서도.

“조금만 더 자고 일어나. 밥 먹고 유치원 가야지.”

“아니, 많이 잘거야. 아주 대단히.”

“에이, 그러다가 어린이집 늦으면 어쩌려고.”

“아이, 참, 아빠. 자꾸 이러기야. 오늘은 크리스마스라고. 빨간 날!”

그제야 상철은 오늘이 휴일인 줄 알아차렸다. 휴일도 없이 일만 하다 보니, 날짜와 요일 감각을 잊고 산지 여러 날이었다. 그때 부엌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으면 나와서 밥 먹을 준비하거라.”

어머니 역시 크리스마스라 파출부 일을 쉬었다. 상철은 달래를 일으켜 욕실로 데려갔다. 달래는 혼자 세수했고, 상철은 옆에서 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마치 공주님을 모시는 시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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