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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권 Oct 03. 2021

인생이 아름다운 이유

제아무리 낭만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산다고 해도 인생이 아름다운 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낭만 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무엇일까. 이탈리아 피오렌체 계단에 앉아 사랑의 꽃을 피우는 청춘의 대회 속에서 낭만의 그림이 묻어 나오기도 하고, 어린 시절 죽을 줄만 알았던 민들레가 봄이 되자 활짝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의 낭만을 얘기하기도 한다.


그 모든 것들의 행위에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서로 얼굴만 마주쳐도 '풋' 하면서 즐거워하는 청춘의 얼굴이 그래서 예뻐 보이는 것 아닐까. 어찌 보면 인생은 아름답기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세상의 사물 또한 그 존재의 유무는 마치 삶의 순환을 유지하는 꼭 필요한 구성원의 존재다. 저명한 과학자가 풀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름다움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부모님으로 받는 무조건 적인 사랑은 찬란하기 그지없는 이유는, 의무에 따른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방법에 깊이 있는 고민을 해본 적이 있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전승환 작가는 "사랑은 받는 게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음을 흔들만한 생각해 보지 못한 얘기에 공감한다.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더 아름다워'라고 사랑을 표현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사랑은 주는 사랑의 고귀함을 말한다. 부모님이 아이를 바라보는 그 사랑과, 연인 간의 서로를 바라보는 사랑, 봉사자의 사회를 바라보는 사랑도 그것과 마찬가지다. 주는 사랑이 사랑의 결정체라 볼 수 있다면, 사랑함에 참여하는 것은 사랑의 완성단계에 올라선 희망적인 이야기가 된다.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삶의 기본은 역시 바라지 않는 일방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말도 백 번 맞는 이야기임에도 나누는 공동의 사랑인 '참여하는 사랑'은 순환되는 사랑이자 나누는 사랑의 완성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젊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젊다는 이유가 아니라 '열정'과 '뜨거운 사랑'을 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서 아닐까. 그렇다면, 열정도 있고 뜨거운 사랑을 할 뜨거운 무언가가 있다면 그 사람은 청춘인 것이다. 젊음이 뭐 별거 있나. 열정과 뜨거움은 자신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 움직임에는 기운이 넘치게 되고 스스로 믿음을 부여하게 된다. 결국 자존감도 빼놓을 수 없는 인생을 사랑하는 방식의 길목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Photo by@paris_shin


자존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있는가?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두발자전거를 처음 배웠다. 보통의 아이들은 자전거 뒤를 잡아주며 "괜찮아"라는 파이팅 속에서 아빠의 믿음을 얹고 처음 배우게 된다. 보통의 경우는 그렇다. 마당의 흙을 집어먹으며 뛰어놀던 나는, 옆집 형의 도움으로 자전거를 처음 배웠다. 문제는 자전거가 성인의 그것이었다는 거다. 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옆집 형의 도움으로 가속도가 붙은 자전거는 간신히 중심을 잡고 있었으나, 문제는 아이의 다리로는 페달을 온전히 밟을 수가 없어 반바퀴 정도만 간신히 까딱거려야만 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나는 당황했고, 행여나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을까 두려움이 치솟았지만, 짧은 다리로 간신히 까닥거리며 페달을 옮기는 그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구경나온 친구들과 자전거를 잡아주던 옆집 형은 큰소리로 낄낄거리며 웃기에 바빠 보였다. 도움이 필요했던 나에게 그들의 하얀 이빨은 나를 울리기에 충분했는지 창피함만 남은 첫날이었다. 그렇게 뭉개진 자존감은 어린아이를 유독 대중들 앞에서 소심하게 성장시켰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괜찮아" "걱정하지 마"라고 한마디만 해주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자존감은 그런 것이다. 무너트리기는 쉽지만 다시 복원하기는 정말 어렵다. 특히 가기 중심이 약한 사람일수록 그 복원의 시간은 더디기만 하다. 누군가는 자존감과 소심함을 구분 짓지 못하는 얘기를 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소심하다고 해서 자존감이 무너지거나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라는 거다.


러시아의 소설가 투르게네프는 인간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했다. 생각만 많지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햄릿형'과, 우스꽝스러운 존재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실수를 해도 저지르고 보는 '돈키호테'형이다. 스페인의 세르반테스의 소설 속에 존재하는 이달고는 녹슨 갑옷과 힘에 부치는 듯한 말을 타고도 용기와 실행력 하나만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유지한다.


'낭만'이라는 단어가 돈키호테 소설에서 어떤 존재의 가치를 내보이고 있는지 살펴본다면, 이달고 그만의 꿈을 이루기 위한 도전이라는 큰 산 앞에서 두려움 없이 행동하는 것이다. 즉, 행동력이 있다면 꿈을 꿀 수 있고, 때로는 그 꿈을 이룰 수도 있는 것이다. 조금 억지스러운 주장일 수 있으나, 결국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그 행복의 시작점은 꿈을 꿀 수 있는 자기 행복권의 쟁취에 있지 않을까.


온전히 나답게 살기 위한 조건은 이처럼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나답게 사는 것. 소심한 인생을 접어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 자존감의 게이지가 정상적인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시작하는 인생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앞으로 나갈 에너지가 꽉 채워지면 실수를 해도 저지를 수 있는 용기를 품게 되니까 말이다.


인생이 아름다운 이유는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있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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