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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상권 Oct 08. 2021

위로에 대하여

어느 때보다 위로받고 싶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전남 해남의 울돌목의 빠른 유속처럼 바뀌어 가는 일상을 마주하다 보면 닥쳐오는 위기는 셀 수 조차 없다. 그렇게 매일 도전의 연속이고 해결의 지속과 같은 현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우리에게 그래서 위로는 나를 살려내는 또 하나의 양식과 같다.


완벽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그럼 완벽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남자 친구가 자신만을 바라보며 꼭 필요할 때마다 사랑의 목소리를 전해주며 원만한 사랑을 이어나가는 게 과연 완벽해지기 위한 수단일까. 가끔은 남자 친구도 자신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자신 역시 남자 친구의 사랑 섞인 역할이 필요한데, 그것을 충족하지 못해 다툼이 발생하고 서로 상처를 입기도 한다.


사회에 진출한 새내기들은 자신이 그렇게 열망해온 조직이 결국 들어가서 보니 입안에 건빵을 5개나 집어넣고 삼키려는 듯한 답답함을 느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사회는 녹녹지 않고 영화나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보던 그런 낭만적인 곳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을수록 내 몸과 마음은 망신창이가 되어 간다. 그래서 소주 한잔의 시간은 나를 살려주는 유일한 시간일 때도 있다.


상처 입은 당신이 저 멀리 보인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다가가기에는 나 역시 상처가 깊어 움직일 수가 없다. 이런 상황의 중복이 반복될수록 서로의 아픔을 보듬을 수 있는 감각은 무뎌져만 가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섣불리 상처를 치유하려고 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그렇게 또 다른 상처의 원산지가 되기도 한다.


Photo by@paris_shin / 한상권


첫 책을 내고 나니 많지는 않지만 이메일이나 SNS를 통해 들어오는 상담은 꾸준하다. 대부분 일상 속에서 받은 상처를 안고 있었는데,  그 깊이가 가끔은 아플 정도로 깊어 보일 때가 있다. 


한 번은, 고등학교 선생님의 이야기다. 김민정 선생님은 자신에게만 못되게 구는 한 남자 학생이 안쓰럽기만 했다. 조금만 방향을 잡아주면 바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나 보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처럼, 유독 못나고 부족해 보이는 그 학생에게 눈이 많이 갔나 보다. 한 번은 따로 불러 "조금만 힘내면 좋은 학교에 갈 수 있으니까 힘내자, 내가 도와줄게"라고 말하면, 학생은 "구질구질하게 왜 그래요"라며 맏 받아쳤다. 


자신이 가진 전부를 내어주려는 듯 아이에게 정성을 쏟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아이는 조금씩 멀어져만 가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렇게 선생님은 자신이 아끼던 학생으로부터 상처를 입었다. 아마도 학생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선생님을 받아들일 마음의 양식이 차있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선생님과 학생의 이야기가 아니라 선생님과 나와의 이야기다.


그렇게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치 내 어린 시절이 떠올라 가슴이 시렸다. 그래서 그럴까 마치 내가 그 거칠었던 학생의 모습으로 투영되는 느낌이었다. 물론 생각하는 게 조금은 다를 수 있었을 테지만, 왜 그 학생이 김민정 선생님에게 유독 싫은 투정의 모습이 빈번했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듯했다. 사실이기도 했지만.


"나는 당신과 당신의 제자인 그 남자아이가 왜 그랬는지 알고 있으니까 내 얘기 들어봐"라고 내 머릿속을 휘감으며 말은 빨라졌다. 나 역시도 어렸을 적 학교생활만큼은 그 어느 아이 못지않게 불량했고 선생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면 잘 망칠 수 있고, 다시 회복할 수 있는지 몸으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의 생각, 그리고 선생님은 앞으로 그 아이와의 관계를 정리하라고 일러주었다. 문제는 그거였다. 내가 마치 선생님의 상황을 전부 이해한 듯하다 보니, 말이 많아지고 상담을 받는 사람이 말이 많아지고 불필요한 미사여구가 한바탕 가미된 사실보다 증폭된 이야기로 선생님을 위로하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절대 불변하는 심리 원칙 하나가 있다. 거짓된 이야기에는 전문 사기꾼이 아니고서야 눈빛이나 얼굴에 다 나타나게 되어 있다고. 나 역시 어줍잔지 않게 증폭된 이야기는 터무니 없어지기까지 했으니, 화자가 받아들이기에는 어땠는가. 대번에 선생님은 알아차렸고, "작가님 그렇게 까지 애쓰지 않으셔도 돼요"라는 짧은 한 마디를 하고 화자를 다른 데로 옮겼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기가 무섭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들어가고 싶었다. 책 펴낸 작가랍시고, 그리고 상담을 해왔고, 또 불량하거나 사회적 응이 부자연스러운 청소년과 청년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는 자만에 차 있던 거다. 자만이 아니라 어쩌면 완벽한 위로를 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불완전함에도 그랬다.


어줍잖은 충고나 위로보다는 그냥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게 더 힘이 되기도 한다. 가끔 사람은 자신이 겪어왔던 세계에 갇혀 그 세상이 지식의 전부인 듯 베베 꼬인 인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들어주고, 의견과 방법을 제시하기보다는 공감해주는 게 필요하다. 사람은 그 상황을 잘 알고 있고 해결 방법 또한 그동안 자신이 해온 고민 속에서 찾게 된다. 선생님은 나와 상담하면서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을 바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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